너에게 닿을 나의 세계
홍콩에 살면서 내가 가장 성실하게 치러낸 의식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누군가의 ‘페어웰(Farewell)’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홍콩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환대하고 또 떠나보내는 정거장 같은 도시였다. 누군가는 서울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싱가포르로, 런던으로, 뉴욕이나 도쿄로 훌쩍 떠났다. 나는 꽤나 충실한 배웅객이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친구, 아이 친구의 가족이나 남편의 직장 동료까지. 꼭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도 기꺼이 그 자리에 함께했다. 성대한 저녁 식사든 조촐한 찻자리든 형태는 달랐지만, 우리는 늘 누군가의 뒷모습을 향해 부지런히 손을 흔들었다.
홍콩에서 10년 이상 살아온 이들에게 이 도시에 묻어둔 이별의 횟수를 묻는다면, 아마 그들은 오래된 와인의 빈티지를 헤아리듯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달관한 듯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어휴, 셀 수도 없죠. 여긴 원래 그런 동네잖아요.”
내가 살아낸 그 시절의 홍콩에서 머묾과 떠남에는 불확실성이 짙게 깔려 있었다. 금융, 사업, 혹은 저마다의 다채로운 야망과 사연으로 이 도시에 닻을 내린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이 이 섬에 언제까지 머물게 될지 알지 못한 채 트렁크를 열었다. 잠깐의 기항지인 줄 알았는데 십 년을 넘기기도 하고, 영원히 머물 것처럼 뿌리를 내리더니 어느 날 아침 훌쩍 짐을 싸버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먼 도시로 훌쩍 떠난 뒤에는 때로 슬픔보다도 더 오래가는 이상한 허무가 남았다. 한때 그토록 많은 시간과 진심을 나누었던 관계가, 물리적인 거리 하나로 너무도 손쉽게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는 듯한 허무였다. 어쩌면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헤어짐 그 자체보다, 그렇게 서로의 삶에 중요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의 과거’가 되어버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같은 질문이 남았다.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일까? 당신 역시 내게 그러할까?
물리적 거리는 사람을 내 욕심껏 끝까지 붙잡아둘 수도 없게 하고, 관계를 내 마음처럼 예전의 뜨거운 온도로 묶어둘 수도 없게 한다. 내가 없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당신 역시 당신만의 새로운 우주를 부지런히 지어 올리며 살아가야 함을 알기에, 그 벅찬 일상에 대고 실은 그 어떤 투정도 부릴 수 없음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한때 매일같이 안부를 묻던 소중한 사람과 서로의 하루를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법을 조용히 체득한다. 그곳에는 거스르지 말아야 할, 서글프지만 명확한 선이 그어진다.
하지만 이 기약 없는 멀어짐을 여러 번 묵묵히 통과해 낸 사람들에게는, 그럼에도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고유한 방식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종종 별것 아닌 듯 이상하고 맥락 없는 작은 신호들을 주고받으며, 아직 서로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불쑥 작은 용건에 얹혀 오는 안부, 문득 상점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 마치 어느 잡지나 신문에서 발견해 당신을 위해 소중하면서도 하찮게 오려둔 듯한 정보들, 어디서 주웠는지도 모를 우스꽝스러운 농담, 오래전에 함께 읽었던 책의 한 구절, 느닷없이 시작되는 사뭇 진지한 논의, 언젠가 흘려 말했던 나의 일정을 기억하고 건네오는 한마디, 한밤중 흔들린 채 찍혀 온 음식이나 와인 사진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때로 꽤나 조잡하고 매끄럽지 못하다. 그것은 완성된 메시지라기보다는 작은 ‘신호’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치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손전등 불빛이나 무전기 너머로 지지직대며 들려오는 한마디처럼. 멀리서 등대가 배에게 불빛을 보내듯, 내가 여전히 여기 있고 당신이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윙크 같은 신호.
아무런 효용도, 목적도 없지만 이 작은 신호들은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아,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지금 당장 당신의 삶에 내가 없어도, 당장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더라도, 우리가 예전처럼 긴 대화를 나눌 수 없어도 — 나는 여전히 당신이 간직한 기억의 한 조각이라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다정한 신호는 우리를 마치 숙련된 야간 비행사처럼 만들어 준다. 캄캄한 비행 속에 홀로 있어도, 그 작은 불빛들만으로 충분히 거뜬하게 이 밤을 날아갈 수 있다고. 기나긴 비행이 끝난 뒤 만나게 될 따뜻한 저녁 식사와 밤새 이어질 떠들썩한 웃음, 당신을 위해 내가 고른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다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낼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을 알기에.
반대로 신호를 보내도 응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느낄땐 나 역시 거리를 배운다. 어쩌면 당신의 삶은 너무 바쁠지 모른다. 당신의 삶에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신호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복잡하고, 우리는 각자가 견뎌내는 세계를 고스란히 존중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다른 온도를 이해하고, 때로 정중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더 애써 신호를 보내지 않고, 관계가 새롭게 놓인 자리를 확인해 그 거리에 맞게 내 마음의 자리도 조금 옮겨둘 뿐이다.
그 시절의 홍콩, 쉼 없이 사람들이 교차하는 정거장 같은 도시에서 살았다는 것은 어쩌면 관계에 대해 조금 더 까다롭고도 아름다운 것을 배울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내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깊이 사랑하는 법을, 서로를 곁에 억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서도 오래도록 잊지 않는 법을, 그리고 한 사람이라는 고유한 우주가 품고 있는 그 아득한 소중함과 짙은 밀도를 가르쳐주었다.
또한 수많은 이별을 묵묵히 통과해 낸 이들 사이에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특유의 단단한 연대가 있음도 가르쳐주었다. 상실이 남기는 파장을 뻔히 알면서도 또다시 누군가에게 깊이 마음을 내어주고 연결되고자 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물리적으로 멀어진 뒤에도 ‘우리의 관계는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야’라는 확신을 서로에게 쥐여줄 수 있는 관계는 때로 놀라울 만큼 끈끈해진다. 이별을 모르는 이들이 자연스레 누리는 관성적인 지속보다, 수많은 떠남을 뼈저리게 겪어본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최선을 다해 붙들기로 선택한 지속에는 완전히 다른 밀도의 애정이 깃든다. 그것은 관계가 깊고 속마음을 나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내일 당장 당신이 떠나거나 내가 떠나게 되더라도, 당신에게 내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사람일 것이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단단한 믿음. 반복된 이별과 상실이 남긴 흉터에 가장 효과적인 연고는 바로 그것임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잊지 않고, 이어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여전히 답은 모르지만, 나는 실험 중이다. 물리적으로 멀어졌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도 그런 실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작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하지만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맹세와 약속이 아니라 이토록 작고 따뜻한 사소한 연결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한때의 찬란함이 아니라, 그 시간이 남긴 생명력이다. 함께했던 시간이 단지 지나간 계절의 유물로 남아야 할 이유는 없다. 꽃은 졌더라도 그 자리에 맺힌 열매와 흩어진 씨앗은 또 다른 계절을 살아갈 테니까. 관계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한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계속될 수는 없어도, 서로의 시간은 다른 모양의 관계로 자라나며 여전히 각자의 삶에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투박하고 때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 섞인 작은 신호로나마 서로에게 닿는 관계일지라도 — 적어도 그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현재이자 우리가 함께 맞이할 다가올 미래니까.
얼마전, 지구 반대편에서 작은 신호를 주고 받는 주명 언니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환대는 꼭 내가 어디에 들어갈 때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해주는 건 줄 알았는데, 석인 씨는 같이 있던 사람인데도 새로운 세계로 역으로 환대해주는 사람이에요.”
순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맞아.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나간 사람으로 과거에 남겨두는 대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기꺼이 다시 환대하는 일. 예전과 똑같은 온도를 되찾으려 애쓰기보다, 각자가 새롭게 지어 올린 세계 한편에 서로 머물 수 있는 작은 자리를 내어주는 일.
주명 언니가 떠나던 날, 나는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하루 종일 멈추지 않고 울어댔다. 그녀가 없는 홍콩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뉴욕이 벌써 집처럼 느껴져 홍콩에서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언니에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영락없이 질척이는 전 연인 같았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홍콩을 떠난 뒤에는 예림 언니가 보내오는 Stories 글을 읽으며, 언제든 돌아가 편안히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그녀와 여전히 따뜻한 대화를 나눈다. 떠나온 뒤에도, 멀어진 뒤에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작은 자리를 남겨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당신에게 닿을 나의 세계를 짓는다.
오늘은 주명 언니가 미국에서 본 등대와 빨간 배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었다.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책의 구절과 함께.
“네리는 시스네로스 기항지 비행장을 향하여 명했다. 시스네로스 비행장이었다면 등대를 껐다 켰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시하던 냉혹한 불빛은, 변함없는 별이라 깜박이지를 않았다. 휘발유가 점점 떨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금빛 낚시 바늘을 물었으니, 그때마다 그것은 진짜 등대 불이었고, 매번 그것은 비행장이요 삶이었다. 그런 뒤 우리는 또 별을 바꿔야만 했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어째서 우리는 늘 이렇게 실패하는 걸까. 숙련된 야간 비행사들마저도 별을 등대 불이라 생각하고 금빛 낚시 바늘을 덥석 물어버린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별을 바꾸고, 또 바꾼다. 늘 엉망인 것만 같은 내게도 조금은 위안이 되는 걸까.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관계의 거리 앞에서 종종 상처받고 길을 잃을 것이다. 어떤 날에는 다시 깊이 앓아누워, 한동안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그 캄캄하고 시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털고 일어나 저 멀리 깜빡이는 작은 불빛을 바라볼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