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나를 부를 때
긴 이야기가 된다는 것
북클럽을 하며 늘 새삼스레 깨닫는 사실은, 같은 책을 펼쳐도 그 너머에서 끌어오는 의미와 해석의 관점은 저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나는 첫 장을 열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내내 ‘이야기(Story)’라는 주제에 깊이 골몰하며 읽었다.
‘이야기’란 과연 무엇일까.
『끝없는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판타스티카를 구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 아트레유의 진짜 임무가 결국 이 세계를 직접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트레유 자신은 끝내 세계를 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실패했다는 수치심과 절망을 안고 어린 여왕 앞에 돌아온다. 그러나 어린 여왕은 오히려 그가 임무를 완벽히 해냈다고 말한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는 스스로 하나의 ‘긴 이야기(Long story)’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밖의 누군가를 이곳으로 초대할 만큼 아름답고 용기 있는 모험과 여정의 이야기 그 자체가 되는 것.
아아. 아트레유의 임무는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니!
이 두꺼운 소설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대목이다. 어쩌면 훌륭한 삶이란 대단한 무언가를 쟁취하고 이룩해내는 것보다도, 그저 ‘하나의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 자체가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서사 안에는 모험도, 실패도, 좌절도, 용기도, 함께하는 소중한 동료와 친구들도 존재한다. 완벽한 하나의 ‘성취’는 홀로 우뚝 서서 빛날지 모르지만, 수많은 기억과 결함이 엮여 만들어진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트레유의 이야기가 바스티안에게 닿았던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고 나누어질 것이다.
이야기가 나를 부를 때
아트레유의 아름다운 ‘긴 이야기’에 이끌려 판타스티카로 들어가는 사람은 현실 세계의 소년 바스티안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이야기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자신은 그저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일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책이 돌연 입을 열어 바깥에 선 독자의 이야기를 서술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나 자신이 이미 이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였다니.
실은 내게도 이와 닮은,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경험이 딱 한 번 있었다. 오래전 성경의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던 어느 날의 기억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정말로 불현듯, 수천 년 전 바울이라는 저자가 부르짖어 말하는 그 ‘이방인’이 까마득한 로마 제국 시대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이 날벼락처럼 다가왔다. 지금 이 오래된 텍스트가 거짓말처럼 내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그러자 그가 말하는 구원도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는 문장의 ‘우리’라는 단어 안에, 놀랍게도 웅크려 있던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한참 후에야 그 경험이 ‘회심’이라는 단어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며 새삼 이렇게 설명해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교리나 진리를 깨닫게 된 순간이라기보다, 내가 비로소 그 오래된 ‘이야기의 일부’임을 알아차린 순간이었다고.
흥미롭기도 하고, 사실은 잘 이해되지 않았던 지점은 어린 여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도 바스티안이 좀처럼 이야기 안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결국 어린 여왕은 다소 극단적인 마지막 방법을 택한다. 판타스티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노인을 찾아가 『끝없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바스티안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어린 여왕은 자신과 판타스티카 전체를 담보로 이야기를 끝도 없는 굴레 속에 가둔다.
결국 그것이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가 나를 부를 때’ 그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 이야기를 믿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 손을 잡지 않으면, 새로운 이야기는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영원히 그 이야기의 바깥에 선 독자로 남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꽤 열렬하게 ‘이야기’가 되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고 싶고, 동시에 내가 발견한 흥미롭고 재미있는 세계가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자꾸 손을 내미는 사람.
어린 여왕은 끝없는 굴레를 만들어서라도 바스티안을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했지만, 사실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가자고 끝까지 손을 내미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손을 잡을지 말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 해도 한 사람을 억지로 그 안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바스티안이 마침내 용기를 내어 어린 여왕의 새로운 이름을 외쳐 부르는 순간, 그 역시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멈춰 있던 이야기는 비로소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기억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
바스티안의 여정에서 또 생각해볼 만한 것은 ‘기억’이었다.
바스티안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질수록 현실 세계의 기억을 하나씩 잃어간다. 더 강하고, 아름답고, 위대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어갈수록 과거의 자신에게서는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옛 황제들의 도시’에는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이 살아간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기에 돌아갈 수 있는 과거가 없고, 과거가 없기에 현재의 자신을 설명할 수도, 미래를 그려낼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 이곳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인간이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곳처럼 보였다.
어쩌면 우리의 불완전함과 결함, 그로 인해 겪어온 수많은 경험과 감정, 그 시간을 함께 지나온 똑같이 불완전한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품고 있는 ‘기억’이야말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재료인지도 모른다. 기쁘고 아름다운 기억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실패했던 순간과 부끄러웠던 모습, 오래 남은 상처와 아픔, 지워버리고 싶은 결핍까지도 모두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야기의 일부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바스티안이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과거의 불완전한 자신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은, 자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재료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사랑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이 세계에 초대된 바스티안이, 정작 완벽함을 좇는 동안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기억은 혼자서만 보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나누어 가진 기억 역시 그것을 오래 간직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아트레유가 마지막까지 바스티안을 위해 해준 일 역시 그랬다. 모든 기억을 잃고 자기 이름조차 말할 수 없게 된 바스티안을 위해 그의 이름을 대신 불러주고, 그가 들려준 모든 이야기를 ‘친구’의 자격으로 기억하고 증언해준 것. 바스티안 자신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친구가 곁에 남아 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어 기억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내가 잃어버린 어느 시절의 나를 함께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다시 불러주는 것.
그렇기에 한 사람의 ‘긴 이야기’는 어쩌면 혼자서만 기억하고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일
『끝없는 이야기』의 후반부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는 ‘소원(Wish)’이다.
바스티안은 처음에는 더 멋지고, 강하고, 지혜롭고,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수많은 소원을 하나씩 통과해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DO WHAT YOU WISH.”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정의된다.
소원은 단순히 “나는 이것을 원해”라며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지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날것의 욕망에 가까웠다. 하나의 소원을 이루어야 비로소 그 아래 숨어 있던 다음 소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DO WHAT YOU WISH”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라는 백지수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끝까지 파헤쳐 발견해내라는 말이었다.
위대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나고,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는 소원을 지나 ㅡ 바스티안이 마침내 발견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고 난 뒤에야 또 하나의 소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그것이 바스티안을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게 해줄 마지막 소원이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야기가 되어 살아가는 능력
결국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스티안에게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결핍과 감정을 하나씩 지워내며 완벽하고 위대한 자신으로 빚어낼수록,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지탱하던 기억과 관계, 감정들을 잃어갔다. 서사를 만들어내는 그의 힘은 자신을 부풀리고 타인을 제 욕망 아래 무릎 꿇리는 데 오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판타스티카의 수많은 존재들 역시 비극에 휘말렸다. 실은 바스티안은 사랑을 받는 법도, 사랑을 하는 법도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반대로 아트레유에게는 바스티안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그것을 판타스티카의 현실로 이루어내는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기꺼이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하나의 아름다운 ‘긴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어린 여왕과 판타스티카를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길을 나섰고,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깊은 상처까지 입힌 바스티안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바스티안이 판타스티카에 남겨놓은 존재들과 사건들을 대신 수습하겠다고 약속하고, 모든 기억을 잃은 그를 다시 현실 세계로 돌려보낸 것도 아트레유였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스스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살아가는 능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닐까. 아트레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여정을 시작했고, 바스티안은 긴 여정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면 바스티안의 ‘이야기’ 역시 아트레유의 사랑이 없었다면 시작될 수도, 끝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끝없는 이야기는 늘 누군가를 부르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꼬리를 문 뱀처럼 제자리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던 닫힌 이야기는 마침내 자신을 부르는 이야기를 믿고 그 안으로 뛰어드는 한 사람을 만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통과한 이야기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다시 누군가를 부른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진정 ‘끝없이’ 숨 쉬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 나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은 결국 나 아닌 존재를 향해 손을 내미는 일이고, 어쩌면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내미는 손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도,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이야기를 오래 기억해주는 일도, 그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일도, 결국은 모두 나 아닌 존재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결핍 하나 없이 완벽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흠집 많고 불완전한 한 사람의 삶이 사랑을 품고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렇게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며, 비로소 끝나지 않는 서사가 된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01. 지금 내 앞에 ‘나를 부르고 있는 이야기’는 없는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나를 부르는 새로운 이야기에 응답해 기꺼이 ‘풍덩’ 뛰어들어본 기억이 있는가? 그 경험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되었는가?
02. ‘이야기를 만드는 삶’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
바스티안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아트레유는 스스로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또 어떤 이야기가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03. 나의 ‘긴 이야기’를 함께 기억해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잊고 있던 어느 시절의 나를 기억해주거나, 내가 누구였는지를 다시 불러준 사람이 있는가? 반대로 나는 누군가의 어떤 이야기를 함께 기억하고 증언해주는 사람일까?
함께 읽고 싶은 책
C. S. 루이스, 『예기치 못한 기쁨』과 『나니아 연대기』
『끝없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마침 C. S. 루이스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을 함께 읽고 있었다. 두 작가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이야기’와 ‘상상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겹쳐졌다.
어린 시절부터 신화와 전설, 시와 이야기에 깊이 매혹되었던 루이스는 그것들을 읽을 때마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깊은 갈망을 경험했고, 훗날 그것을 ‘기쁨(Joy)’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에게 기쁨은 그 자체가 목적지라기보다 어딘가를 가리키는 표지판에 가까웠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신화가 불러일으키는 갈망 역시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의 어떤 실재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는 J. R. R. 톨킨과의 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화를 아름답지만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로 여기던 루이스는, 신화와 이야기가 반드시 진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자신이 오래 사랑해온 신화가 가리키던 것이 현실 속에서 실제 사건이 될 수도 있음을 발견한다. “Myth became fact.”
그래서 루이스에게 이야기는 그 자체가 목적지라기보다 자기 바깥의 어떤 실재를 내다보게 하는 창문에 가까워 보인다. 반면 엔데에게 이야기는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현실에서는 살아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삶을 살아보고, 그 경험을 품은 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세계에 가깝다. 루이스에게 이야기가 어떤 실재를 향해 열린 창문이라면, 엔데에게 이야기는 직접 들어가 살아보고 다시 돌아오는 또 하나의 세계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니아 연대기』까지 함께 읽어보면 더욱 재미있다. 루이스의 아이들 역시 다른 세계로 들어가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낸 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다만 나니아가 현실 너머의 더 큰 실재를 가리키는 세계라면, 판타스티카는 인간의 상상과 욕망, 기억과 사랑을 직접 살아내보는 세계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두 작가를 나란히 읽고 나면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인간은 과연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살아보게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