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이라는 철학적 도구
우리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진 우화 같은 소설, 『어린 왕자』의 작가로 익숙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하지만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정체성이 다름 아닌 ‘조종사’였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정이 너무도 깊으면 도리어 적확한 언어를 고르기가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내게 생텍쥐페리의 세계가,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대지』가 정확히 그러하다.
오래전 아버지의 서재 한구석에서 우연히 빼어 들고 읽어 내려갔던 이 책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동경’의 세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시절의 기억과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래서일까. 다가오는 북클럽 모임에서 나는 큰 애정 탓에 오히려 입을 다문 채 별다른 말을 얹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끝내 한 편의 번듯한 글을 완성해 낼 수 있을지조차 스스로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 글은 서평이라기보다, 우리 북클럽 멤버들을 위해 미리 띄워 보내는 ‘작은 비행 지도’ 정도로 여겨주었으면 한다.
책이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생텍쥐페리의 삶을 관통하는 ‘조종사’라는 정체성과 『인간의 대지』의 창공을 함께 날았던 동료들, 그리고 초기 항공 역사의 배경을 먼저 짚어두려 한다.
생텍쥐페리는 인류의 항공 역사와 거의 동시에 성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세 살이 되던 1903년, 라이트 형제의 최초 동력비행이 성공했고, 스물여섯이 되던 1926년, 그는 이제 막 태동한 장거리 항공우편 산업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발전한 항공기술이, 이제 막 포연을 걷어내고 민간의 영역으로 뻗어 나가던 격동의 시기였다.
『남방우편기』, 『야간 비행』, 『인간의 대지』, 그리고 『어린 왕자』. 이 네 작품은 저마다 문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내게는 1920~30년대 초기 항공 개척기의 생생하다 못해 날것 같은 경험이 그의 아름다운 문학 세계를 밑바닥에서부터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사실상 ‘문학’ 그 이상의 무언가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불과 이 짧은 시기, 하늘에 새로운 길을 내던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세계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다는 것의 의미는.
네 작품 가운데 『인간의 대지』가 실제 비행과 사건들을 회고하고 성찰한 자전적 에세이라면, 나머지 세 편은 소설이다. 하지만 그 허구의 세계들조차 생텍쥐페리 자신이 직접 비행기를 몰며 겪어낸 시간과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 아름다운 『어린 왕자』마저도.
책을 읽을 때 꼭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생텍쥐페리가 1926년 항공우편 조종사로 비행을 시작하던 무렵, 그와 동료들이 몰았던 비행기는 우리가 오늘날 떠올리는 크고 견고한 항공기와는 전혀 다른, 놀랄 만큼 단출한 초기의 기계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개척하던 장거리 항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정밀한 항법장치도, 충분한 기상정보도 없었다. 기본적인 비행 계기는 있었지만, 특히 이 초기의 항로에서는 자신의 두 눈으로 땅을 내려다보며 길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도 위의 지형과 창밖의 풍경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자신이 어디쯤 날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1920년대 항공우편 노선에서 사용된 라테코에르 25 계열 항공기. 초기 항공우편 조종사들은 이러한 단발 프로펠러 항공기로 산맥과 사막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Photo: Archives municipales de Toulouse / Wikimedia Commons
1920년대 초기 항공우편 노선에 투입된 라테코에르 25(Latécoère 25). 단발 엔진과 단출한 기체 구조에서 당시 항공 개척기의 기술적 환경을 엿볼 수 있다.
Photo: San Diego Air & Space Museum Archives / Wikimedia Commons
『인간의 대지』 앞부분에는 신참 조종사 생텍쥐페리가 선배 앙리 기요메에게 항로를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기요메는 지도 위의 작은 실개천과 외딴 농가, 들판에 서 있는 나무와 지형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구두로’ 짚어주었다. 생텍쥐페리는 그것들을 자신의 빳빳한 지도 위에 표시하며 머릿속에 새겨야 했다.
날씨가 뒤틀려 짙은 구름이 지면을 가려버리는 순간, 조종사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위치를 잃을 수 있었다. 거대한 산맥 위를 날 때면 발밑의 구름 아래에 어떤 봉우리가 숨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당시 그들이 몰던 단발 항공기에는 의존할 수 있는 엔진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행 도중 그 유일한 심장이 멎어버린다면, 결국 지상의 어딘가로 내려앉아야만 했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발아래 아득하게 펼쳐진 낯선 대지 위에서, 어느 곳이 기체를 안전하게 받아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하늘을 날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두 눈은 언제나 땅을 향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비행 장비를 착용하고 조종석에 앉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항공 개척기의 위험한 비행 경험은 그의 문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 선배 기요메가 생텍쥐페리에게 전수해 준 것은 일반적인 지리 정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들판에 비상착륙할 수 있는지, 어느 지형을 피해 가야 하는지, 어떤 개울을 발견해야 자신의 위치를 확신할 수 있는지. 그것은 먼저 하늘을 날았던 선배가 목숨을 걸고 축적한 경험이자, 이제 막 창공으로 오를 후배가 다시 살아서 대지를 밟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만 했던 절박한 생존의 지식이었다.
그렇게 동료들은 목숨을 걸고 얻어낸 경험을 서로에게 유산처럼 물려주며, 보이지 않는 하늘에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인간의 대지』에 등장하는 메르모즈와 기요메는 언제나 동료들보다 앞서 미지의 항로에 도전했던 인물들이었다. 메르모즈는 1936년 남대서양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기요메는 1930년 안데스산맥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생텍쥐페리가 기록한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늘에 길을 내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인간의 대지』의 「동료들」을 읽다 보면, 그들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우정과 동료애에 속수무책으로 눈물부터 왈칵 쏟아진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대지』를 읽으며 수없이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얼핏 도무지 같은 작가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다른 두 작품을 말이다.
생텍쥐페리가 겪어낸 초기 항공 개척기의 창공은 신화 속 세계만큼이나 낯설고 경이로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섬세한 묘사들을 읽다 보면, 한 인간이 참으로 이토록 기막힌 풍경들을 맨눈으로 마주했다는 사실에 아찔한 경외감마저 인다. 그가 글 속에서 거듭 이야기하는 폭풍과 구름 속 ‘용과의 전투’는 단순히 낭만적인 비유가 아니라, 그가 실제로 감당해왔던 현실이었다.
거대한 대자연이라는 용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는 기사가, 지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속적인 관심사에 깊은 의구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나는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별과 별을 떠돌며 숫자에 집착하고 허영에 빠진 기묘한 어른들을 낯설게 바라보던 『어린 왕자』 속 행성 여행을 떠올린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어쩌면 다소 ‘클리셰’같은 저 문장은, 지상의 셈법에서 벗어나 창공을 가르던 조종사의 삶을 통해 더욱 진실한 고백으로 다가온다.
대지를 내려다보는 방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배 기요메를 통해 그가 배운 것은 나무 세 그루, 고립된 농가와 그곳의 주인, 농부의 아내, 실개천과 양 떼 같은 것들이었다. 책상에만 앉아 있는 『어린 왕자』 속 ‘지리학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영원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풍경들 말이다.
하지만 조종사에게는 바로 그런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마치 하늘 위에서 아득한 로드 트립을 하듯, 지상의 흩어진 풍경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찾아내며 생존의 길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외롭고 고립된 상공의 조종석에 앉아 대지를 내려다보던 그는, 세상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버릴 작고 연약한 것들을 발견해 내고 그 안에서 기적 같은 의미를 찾아내는 법을 훈련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지도 안에 있는 에스파냐는 전등불 밑에서 차츰차츰 동화의 나라가 되었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어린 왕자』를 다시 마주했다.
게다가 낮에도 위태롭기 짝이 없던 비행을 칠흑 같은 밤으로 확장하는 일은 또 얼마나 무모하고 두려운 도전이었을까. 낮에는 그나마 지상의 풍경을 눈으로 확인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 풍경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미 위험천만한 비행에서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각적 단서마저 빼앗기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야간비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상에는 조종사들에게 길을 일러줄 불빛과 항공 등대가 띄엄띄엄 설치되었다. 조종사들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지상에 점점이 흩어진 작고 연약한 빛들을 더듬어 가며 위태로운 항로를 이어 나갔다.
그러니 『야간 비행』을 지배하는 ‘빛과 어둠’은 결코 낭만적인 문학적 수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밤하늘에서 별과 지상의 불빛, 비행장의 신호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 했던 실제 생존의 문제였으며, 그 캄캄함 속에서 목숨을 걸고 비행해야 했던 조종사들의 지독한 외로움의 기록이기도 했다.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 대체 항공우편망을 개척하는 일이 목숨을 걸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들은 누군가가 안전하게 그어놓은 항로를 따라 우편물을 실어 나르는 배달부가 아니었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길을 온몸으로 부딪혀 열어내고, 단절된 도시와 도시 사이의 시간을 허물며 세계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결해 나가는 탐험가이자 모험가였다.
그들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직업에 부여했던 의미 역시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비행이 분절된 대지 위에 전에 없던 무언가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믿음.
물론, 앞서 말했듯 생텍쥐페리가 ‘비행’이라는 세계 그 자체에 속수무책으로 매료되어 있었다는 사실 또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묘사해 놓은 창공의 풍경들을 읽고 있으면, 한 번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그것을 잊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비행기라는 거친 기계를 직접 만지고 정비하는 일, 대지를 박차고 하늘을 난다는 압도적인 감각, 미지의 항로를 향해 기수를 돌리는 모험심,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영웅주의적 낭만까지. 그는 분명 그 모든 매혹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비행에 매혹되어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직업과 함께 하늘을 날았던 동료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의 무게를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책임감과 사명감은 비단 조종사로서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생텍쥐페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항공기 조종석에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비행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을 넘어 문학의 세계를 형성한 중요한 경험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텍쥐페리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 역시, 바로 이 독특한 직업적 정체성에 닿아 있다. 그는 상상과 사유만으로 비행의 세계를 그려낸 작가가 아니라, 진동하는 기체를 직접 몰며 세계의 맨얼굴을 가로지르던 ‘진짜’ 조종사였다. 그의 문학은 바로 그 온몸으로 겪어낸 직업적 경험과 사유를 자양분 삼아 자라났다.
『인간의 대지』의 첫 장에서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도구(implement)’에 관해 이야기한다. 대지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농부에게 쟁기가 필요하듯, 하늘에 정기 항로를 여는 도구인 ‘비행기’ 역시 인간을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문제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비행기란 단순히 하늘을 나는 신기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세계의 이면을 탐색하고, 종국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철학적 도구이자 사유의 매개체였다.
생텍쥐페리가 살아온 조종사의 세계는 거칠고 치열했다. 폭풍과 구름, 산과 바다, 사막과 물의 소용돌이,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목숨을 건 비행을 감행하고, 때로는 ‘용’과 싸워야 했으며, 뼛속까지 스미는 고립과 외로움을 홀로 견뎌내야 하는 세계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별과 달빛, 새벽녘의 여명과 안개 사이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세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대지』를 읽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그 사선(死線)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것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득한 상공에서 무전기 너머로 전해오는 한 인간의 가느다란 신호, 가혹하게 생명을 위협하면서도 끝내 기체를 품어 안는 대지의 두 얼굴, 사막 한가운데서 타는 듯이 갈구했던 물 한 모금의 경이, 동료를 향한 애틋하고도 끈끈한 연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책임감, 그리고 마침내 그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밀려오는 눈부신 환희까지.
그러니 그 모든 현실을 자신의 맨몸으로 뚫고 살아낸 사람이, 『어린 왕자』처럼 그토록 섬세하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냈다는 사실은 결국 모순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어린 왕자』는 그 한 편만으로 도달한 결론이 아닌 셈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 앞에 조종사로서 살아낸 생텍쥐페리의 삶과 사하라 사막에서의 시간이 실재하기에, 『어린 왕자』는 내게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정말 어린 왕자를 그 사막에서 만났는지도 모르지.
아래에는 그의 네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 흐름, 함께 알아두면 좋을 실존 인물들,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생애와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을 항공 역사의 주요 사건들과 함께 정리해보았다.
01 생텍쥐페리의 대표작 네 편
개인적으로는 네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읽으며 발견한 하나의 흐름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남방우편기』에서 개인의 삶과 고독을 이야기하던 시선이 『야간 비행』에서는 조직과 공동의 책임으로 확장되고, 『인간의 대지』에 이르면 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연대와 삶의 의미에까지 뻗어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왕자』에서는 그 모든 질문이 지극히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우화 속에 응축된다.
1. 『남방우편기』 (Courrier sud, 1929) — 29세
첫 장편소설 | 비행, 고독, 사랑과 떠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전간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생텍쥐페리가 1926년부터 항공우편 조종사로 일하며 쌓은 경험, 특히 1927~1928년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프랑스와 아프리카를 오가는 항공우편 조종사 베르니스의 이야기를 통해 비행과 고독, 사랑과 떠남을 그린다. 하늘을 나는 삶과 지상에서의 삶 사이에 놓인 인간의 갈등이 중심에 있다. 생텍쥐페리가 실제 조종사로서 경험한 세계를 처음으로 본격적인 소설로 옮긴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야간 비행』 (Vol de nuit, 1931) — 31세
소설 | 임무, 조직, 희생과 책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남미 항공우편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당시 항공우편 회사들은 운송 시간을 단축하고 연결 범위를 넓히기 위해 야간 운항을 개척하고 있었다. 1929~1931년 무렵 생텍쥐페리가 남미 항공우편 사업에 참여하며 경험한 세계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위험한 밤하늘을 비행하는 조종사들과,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냉혹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개인의 행복과 생존보다 공동의 임무를 앞세우는 태도, 조직의 책임과 인간의 희생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초기 항공 개척기의 영웅주의와 사명감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3.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 1939) — 38세
자전적 에세이·회고적 산문 | 인간의 연대, 책임과 삶의 의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약 7개월 전인 1939년 2월 출간되었다. 1926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생텍쥐페리가 직접 겪은 비행 경험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돌아보며 인간의 연대와 책임, 삶의 의미를 성찰한 작품이다. 주요 배경이 되는 실제 경험은 다음과 같다.
1926년: 항공우편 조종사 생활을 시작하고, 선배 앙리 기요메에게 항로와 지형에 관한 실질적인 비행 지식을 배우던 시기.
1930년: 앙리 기요메가 안데스산맥에서 조난당한 뒤 극적으로 생환한 사건.
1935년: 생텍쥐페리 자신이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해 극심한 갈증과 죽음의 위기를 겪은 사건.
이 책은 사건을 발생 순서대로 기록한 연대기적 회고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의 경험들을 엮어 인간과 세계에 관한 사유로 확장한 문학적 산문이다. 특히 첫 장에서 기요메에게 비행 지리를 배우는 장면은 『남방우편기』가 출간되기 전, 생텍쥐페리가 실제로 어떤 세계에 들어섰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출간 순서로는 세 번째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앞선 두 소설이 탄생하기 이전의 경험까지 담겨 있다.
4.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1943) — 42세
우화적 소설 | 사랑, 상실, 관계와 책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 아래 있던 시기에 미국에서 집필되어 1943년 뉴욕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와 어린 왕자의 만남을 통해 사랑과 상실, 관계와 책임의 의미를 탐구한다. 특히 한 송이 장미와 여우의 이야기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응축되어 있다.
전쟁 중 생텍쥐페리가 겪었던 상실과 분리의 경험은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무엇보다 1935년 사하라 사막에서의 조난은 작품 속 비행사와 사막이라는 설정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단서다. 『어린 왕자』의 사막은 단순히 상상으로 만들어낸 동화적 배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실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장소를 약 7년 뒤 문학적으로 다시 찾아간 공간인 것이다.
P.S. 번역본에 관하여
P.S. 개인적으로 한국어 번역본에는 조금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도 동서문화사에서 네 작품을 모두 엮은 판본이 있었고, 무엇보다 안응렬 선생님의 오래된 번역이 지닌 문학적 아름다움이 좋아 북클럽 도서로 선정했다. 옛 번역투와 한자어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도 있었고.
물론 좋은 점도 많았지만, 영어본과 대조하며 읽다 보니 영어본이 좀 더 편하게 읽히는 부분도 많아, 결국 두 판본을 함께 읽었다.
앞으로 AI를 활용한 번역이 더욱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이 오래된 번역의 문장들은 한층 아름답고 귀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내게는 영어본의 문장들이 조금은 더 담백하고 현실적이며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치 눈앞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프랑스어 원문을 직접 읽을 수 없는 나의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다.
02 생텍쥐페리와 하늘을 함께 날았던 사람들
생텍쥐페리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끈끈한 동료애로 이어진 조종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대지』에 실명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생텍쥐페리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들과 나누었던 우정과 연대, 그리고 함께 겪어낸 삶과 죽음의 경험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아래에는 『인간의 대지』를 읽으며 함께 알아두면 좋을 앙리 기요메, 장 메르모즈, 앙드레 프레보, 그리고 『야간 비행』의 리비에르에게 영감을 준 실존 인물 디디에 도라를 소개한다. 이들의 삶과 생텍쥐페리와의 관계를 알고 작품을 읽는다면, 책 속 이야기가 한층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마흔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비행 중 실종되었듯,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기요메와 메르모즈 역시 각각 서른여덟, 서른네 살에 하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품었던 책임감과 동료애가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의 대지』가 기요메에게 헌정된 작품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생텍쥐페리는 메르모즈의 실종 이후 그를 추모하는 글을 썼고, 그중 일부는 『인간의 대지』에도 반영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비행의 경험을 문학으로 옮기는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하늘을 날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먼저 떠난 동료들을 자신의 문학 속에 오래도록 남겨두는 일이기도 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생텍쥐페리에게 우정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생텍쥐페리라는 멋진 작가 친구를 둔 덕분에, 그들의 삶은 지금까지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앙리 기요메 (Henri Guillaumet, 1902–1940)
생텍쥐페리의 선배 조종사이자 평생의 친구. 1926년 10월 생텍쥐페리가 라테코에르 항공우편 회사에 입사하면서 처음 만났다. 선배 기요메는 생텍쥐페리에게 툴루즈–알리칸테 항로를 안내하며 비행에 필요한 지리와 지상 표식들을 가르쳐주었다. 이 특별한 지리 수업은 『인간의 대지』 첫머리에 등장한다.
1930년에는 기요메가 안데스산맥에서 조난당했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사건이 있었다. 생텍쥐페리는 이 경험을 『인간의 대지』에 담아, 한 인간이 가족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대지』는 바로 이 기요메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장 메르모즈 (Jean Mermoz, 1901–1936)
생텍쥐페리의 선배 조종사이자 동료로, 초기 항공우편 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항공 개척자. 1926년 무렵 툴루즈의 항공우편 조종사 집단에서 생텍쥐페리와 만났다. 기요메와 메르모즈는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으며, 이후 세 사람은 남미 항공우편 사업에도 참여했다.
메르모즈는 특히 남미 항공우편 노선의 확장과 남대서양 횡단 항로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0년에는 항공우편기를 이용한 남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으나, 1936년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실종되었다. 당시 서른네 살이었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메르모즈의 비행과 실종을 회고하며, 항공 개척기에 함께했던 동료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록했다.
앙드레 프레보 (André Prévot)
생텍쥐페리와 함께 사하라 사막에서 조난당했던 항공기 정비사. 1935년 생텍쥐페리가 파리–사이공 비행 기록에 도전했을 때 동승했으며, 비행기가 사하라 사막에 추락하면서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사막을 헤매다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이 사건은 『인간의 대지』에서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조난 경험을 회고하는 대목에 등장한다. 또한 훗날 『어린 왕자』에서 비행사가 사막에 불시착하는 설정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디디에 도라 (Didier Daurat, 1891–1969)
1926년 생텍쥐페리를 채용했던 항공우편 사업의 운항 책임자. 엄격한 규율과 임무 수행을 중시했던 인물로, 『야간 비행』에 등장하는 리비에르의 주요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다.
『야간 비행』에서 생텍쥐페리는 리비에르라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조직의 사명과 개인의 행복이 충돌하는 문제를 다룬다.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인에게 어디까지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가. 도라라는 실존 인물을 알고 나면, 작품 속 리비에르의 냉혹한 결정과 그 이면에 놓인 책임의 무게를 한층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참고로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헌정한 레옹 베르트(Léon Werth, 1878–1955)는 조종사 동료는 아니었지만, 프랑스의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생텍쥐페리와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생텍쥐페리보다 스물두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나이를 넘어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텍쥐페리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유대계 프랑스인이었던 베르트는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생텍쥐페리는 1943년 출간한 『어린 왕자』를 그에게 헌정했다. 특히 헌정사의 마지막에서 그 대상을 ‘어린 시절의 레옹 베르트’로 고쳐 쓴 것이 인상적이다.
03 생텍쥐페리 연보
생텍쥐페리의 작품을 읽을 때 그의 생애와 항공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초기 항공의 주요 사건들과 생텍쥐페리 개인의 비행 경력, 그리고 작품의 출간 시점을 엮어 하나의 연보를 만들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