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빛의 굴절을 막을 수 있을까
다소 과학적으로 들리는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제목은 양자물리학의 ‘양자전기역학(QED)’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유리창에 빛을 비추면 대부분의 빛은 통과하지만 일부는 반사된다. 우리는 보통 그 결과를 결정짓는 숨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양자역학에 따르면, 가령 100개의 광자를 쏘았을 때 그중 어느 정도가 반사될지는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어도, 개별적인 ‘광자 하나’가 투과할지 반사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빛의 경로처럼 쭉 뻗어 나가는 듯 보이다가도, 삶의 어느 지점에서 불쑥 놓인 유리창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빛이 반사되어 되돌아갈지, 아니면 그대로 투과해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 역시 그런 수많은 경계면을 지나며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방향을 달리한다. 이러한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방향의 변화를 삶의 ‘굴절’이라 부르고 싶다. 개별적인 삶의 비예측성이다.
심지어 그 빛은 자신의 앞에 유리창이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유리창은 너무도 투명해서, 때때로 빛은 자신이 투과되었는지 반사되었는지, 어째서 경로가 이토록 꺾여버렸는지 그 순간에는 전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삶은 그러하다.
그리고 포터는 이 삶의 아득한 비예측성과 굴절성을 사람간의 ‘관계’의 측면에서 조명한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그려내는 ‘관계의 굴절’은 꽤나 아프고 슬프다.
얼마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화두가 올랐다. “과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완벽한 ‘소통’이란 가능한 것인가?” 마침 친구가 정희진 작가의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를 읽고 있다며, 그 책은 애초에 ‘우리는 타인과 결코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전제로 시작한다고 했다. 무척 신선하면서도 굉장히 맞는 말이라 여겼는데,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을 읽으며 내내 그 맥락을 떠올렸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소통하고 무엇인가를 경험한다.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 이렇게 해석하며, 이 관계를 이렇게 겪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게 쥐어진 정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타인이 감각하는 관계와 기억은 나와 전혀 다를 수 있으며, 누구도 관계의 실재 전체를 독점할 수 없다.
이 책의 모든 단편에는 바로 그 기저에 깔린 거리감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이야기들은 예외 없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1인칭의 ‘나’는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부모님과 그들의 새로운 연인을,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를, 자식과 제자를, 혹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바라본다. 화자가 들려주는 것은 분명 그들과의 ‘관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바라본’ 존재이자 ‘내가 해석한’ 관계에 불과하다.
타인의 속마음을 전부 다 알 수 없기에 발생하는 영원한 ‘정보의 비대칭’. 그것은 어쩌면 ‘관계’의 필연적인 숙명은 아닐까.
우리는 다만 타인이 하는 말과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표면적인 정보에 의존해야 한다. 미세한 공기의 차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직감, 이유 모를 불안과 걱정이 성큼 다가와도 그 투명한 불길함을 실체화할 방법은 없다.
어쩌면 포터가 포착해 낸 가장 예리한 지점은, 관계를 통과하며 일어나는 타인의 굴절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며, 때로는 그 자신조차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굴절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무력감’을 느꼈고 그것이 꽤 힘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나는 그 감정을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빛은 그저 각자 제 경로를 따라갈 뿐이다. 우리는 그 궤도 위에서 어떤 굴절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때로는 궤도를 한참 벗어난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걸어가다가, 문득 그 모든 균열이 응축되어 폭발하는 거대한 ‘사건’ 앞에 내동댕이쳐진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뼈아픈 상실, 갑작스러운 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타인 내면의 깊은 감정과 방향타를 우리는 미리 알아챌 도리가 없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실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거리감은 진정 우리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의 실체인 걸까? 그게 물론 현실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는 나는 조금은 촌스러운 독자인 걸까? 굴절을 막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 빛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도?
그 예측할 수 없는 경로 위에서도 우리는 결국 서로를 마주하고, 때로는 단단히 붙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생각만큼 무력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는 — 나는 무력하고 싶지 않고, 그 누구도 무력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그저 나의 바람인 걸까.
함께 생각해볼 질문
01. 관계의 거리감과 비대칭성을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인간의 관계에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과 숙명적인 비대칭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관찰자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거리감과 비대칭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그 거리를 조금씩 좁혀갈 수 있는 더 큰 사랑과, 더 깊은 소통이라는 것도 존재하진 않을까?
02.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여러 ‘세계’는 통합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여러 ‘세계’의 충돌로 읽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세계란 반드시 인간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과 가족, 일과 욕망, 서로 다른 분야,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처럼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결국 한 인간으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서로 다른 세계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서로 다른 세계들을 하나의 삶 안에서 어떻게 통합해 나갈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세계의 고유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함께 읽고 싶은 책
알베르 카뮈, 『이방인』과 『페스트』
『이방인』은 카뮈의 ‘부조리’한 세계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 세상과 심지어 가족과의 ‘거리감’ 속에서, 내 눈에 뫼르소는 무심한 사람이라기보다 그 세계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앞둔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과 세계의 무관심을 받아들인다. 그런 뫼르소의 마지막을 보며,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이것뿐인 걸까 생각했다.
그런데 5년 뒤 발표된 『페스트』를 읽으면 이게 정말 카뮈의 세계인가 싶을 만큼 낯선 풍경을 만나게 된다. 세계는 여전히 부조리하고 인간의 고통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다. 의사 리외는 페스트가 휩쓴 도시에서 끝끝내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한다. 요컨대 어떤 구원이나 영웅적인 승리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다만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떤 면에서는 한 명의 ‘성인’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리외는 철저히 현실에 두 다리를 붙이고 서 있다. 다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한 명의 ‘의사’로서 눈앞의 고통과 죽음과 비극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런 리외라는 인물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흥미롭게도 카뮈는 젊은 시절 『기독교 형이상학과 신플라톤주의』라는 논문에서 초기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연구했지만, 이후에는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탐구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감옥을 찾아온 사제가 회개를 권하자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를 터뜨린다. 기독교적 회개와 구원에 대한 카뮈의 강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5년 뒤 출간된 『페스트』에서는 조금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파늘루 신부는 처음에는 페스트라는 생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죄와 심판, 회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방역대에 참여해 사람들과 함께 페스트에 맞서던 중, 죄 없는 아이가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 이후 두 번째 설교에서 그의 태도는 달라진다. 더 이상 고통의 이유를 이전처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채,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신앙 사이에서 훨씬 어려운 질문과 마주한다. 카뮈가 파늘루 신부의 이런 변화마저도 완전히 긍정하는 것은 아닌 듯 보였지만, 내게는 파늘루가 마주한 질문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이방인』과 『페스트』 사이의 5년 동안 카뮈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해 파시즘에 저항했다. 개인이 세계의 부조리를 응시하는 데서 나아가,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시간을 통과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 기독교인들과 함께 활동한 경험이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카뮈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함께 고통을 줄여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 나갔다. 만약 그가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노년에는 어떤 세계관을 갖게 되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카뮈가 만들어낸 리외의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살아내야 할 삶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희생, 용기와 책임, 연대라는 실천적인 삶의 태도야말로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살아내야 할 삶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읽을 때 느꼈던 차가움과 거리감,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무력감은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것과도 어딘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페스트』에 이르면 카뮈는 그 거리감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선택을 보여준다. 부조리한 세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따라 『이방인』과 『페스트』를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과 함께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