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서 돌아오는 길 — 미하엘 엔데 『끝없는 이야기』 ②
『끝없는 이야기』의 전반부가 이야기(Story)가 현실의 인간을 어떻게 그 안으로 초대하는지 보여주었다면, 바스티안이 판타스티카에 들어선 이후의 후반부는 전혀 다른 질문을 시작한다.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 인간은 그곳에서 무엇을 만나게 되는가. 그리고 긴 이야기를 통과한 뒤, 그는 무엇을 가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될 것인가.
어린 여왕에게 “DO WHAT YOU WISH”라는 말과 함께, 소원하는 모든 것이 판타스티카의 현실로 이루어지는 강력한 힘을 선물받은 바스티안. 이제 이야기는 ‘소원(Wish)’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욕망을 따라 흘러간다. 바스티안이 처음 품는 소원들은 ‘과거의 기억’과 결핍에서 비롯된다.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림받던 외톨이’라는 기억에서 ‘잘생기고 멋진 나’를 소원하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었다. 소원들이 실재가 되어갈수록, 그와 함께 현실 세계에서의 기억도 하나씩 사라진다는 점이다. 운동을 못 해 비웃음당하던 아이는 민첩한 소년으로 대체되고, 그와 함께 과거의 기억도 지워진다. 바스티안은 한동안 이 패턴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모습과 능력을 얻으며 성취감과 환희를 맛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판타스티카의 존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아트레유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 되어 우러름을 받고 싶다는 시기심으로, 마침내 판타스티카의 황제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까지 이어진다. 급기야 바스티안은 ‘과거의 나’를 알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해 주던 친구 아트레유에게까지 검을 휘둘러 깊은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바스티안은 곧 한계에 봉착한다. 애초에 어린 여왕이 준 힘과 능력으로 소원을 이루어온 건데, 그 힘으로 여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절망한 바스티안은 ‘옛 황제들의 도시’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바스티안보다 앞서 판타스티카에 왔다가 인간 세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고 돌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원들을 좇아가다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렸거나, 황제가 되려다 실패한 채 유령 같은 도시에 갇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기억을 상실했기에 그들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과거가 없었다. 과거가 없기에 현재도, 미래도 사라졌다.
이 지점에서, 우리 북클럽에서 피어났던 ‘기억’에 관한 대화들을 잠시 꺼내어 놓고 싶다. 주명 님은 책을 읽으며 유독 ‘기억’이라는 단어를 따라가게 되었다고 했다. 나에게 기억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통해 그 기억들을 간직하고 다시 불러내는가. 주명 님에게는 ‘요리’가 그런 기억의 중요한 매개체라고 했다. 그러자 지언 님은 바스티안이 ‘소원을 이루고 기억을 잃는다’는 설정이 단순한 대가라기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간절히 원하던 모습이 되어갈수록 과거의 나와 자연스레 멀어지듯,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지듯, 엔데는 이 자연스러운 망각의 원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게 화두는 자연스럽게 ‘기억’ 그 자체로 흘러갔다. 준영 님은 기억이란 결코 ‘잊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묻히는’ 것이라며, 책 속 ‘그림 광산’에서 잊힌 기억의 이미지를 캐내듯 우리의 기억도 내면 깊은 곳에 묻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지언 님은 사진, 음악, 향기 같은 감각들이 어떻게 그 묻힌 기억들을 단숨에 길어 올리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는 흩어지는 기억을 ‘보관’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이 있을까? 혜경 님의 이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번쩍 들고 “기록!”을 외쳤다. 누군가의 눈에는 유별난 ‘기록광’처럼 보일지 몰라도, 연도별, 월별, 일별로 분류할 수 있게 남겨두는 기록은 내게 가장 자연스러운 기억의 저장소다.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짧게라도 적어두면, 그것은 마치 외부 대용량 저장소처럼 된다. 기본적으로 거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크다. 적어두지 않으면, 나란 존재의 기억력으로는 도무지 그 순간들을 온전히 ‘기억’해 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저장소는 때때로 다정한 ‘초콜릿 상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문득 기억을 꺼내고 싶을 때마다 그 상자를 열어 하나씩 달콤하게 맛보듯, 그때의 감정과 생각들을 가만히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짧은 기록들은 훗날 내 소중한 글감이 되어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의 현재를 흠뻑 감사하게 하고 다가올 미래를 긍정하게 만드는 아주 단단한 재료와 근거가 되어준다.
나의 대답 끝에, 혜경 님은 또 하나의 멋진 방법을 보태주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을 누군가와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겨진 사람들이 그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나누고 이야기하며 그 존재를 다 함께 기억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 북클럽 역시 그런 것 같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나 역시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가 가진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크고 따뜻한 ‘기억의 총합’을 만들어 내는 이 이어짐에 대하여.
이렇듯 북클럽에서의 대화는 무척이나 따뜻하게 흘러갔지만, 다시 텍스트로 돌아와 찬찬히 곱씹어 보면 엔데의 세계관은 꽤나 극단적인 면을 품고 있었다. 결국 엔데가 벼랑 끝까지 밀어붙여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그 끝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자신이 원하던 화려한 모습이 될 때마다 과거의 초라한 나에게서 하나씩 멀어진다면, 언젠가는 현재의 나를 지탱하고 설명해 줄 기억도,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소망할 미래도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에서 단절되어 ‘모든 것을 다 이룬 나’가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진공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아닌 나’가 되어버리는 것. 엔데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는 마법같은 세계’의 뒤에, 다름 아닌 바로 그런 무서운 세계를 놓아두었던 것이다.
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바스티안은 향나무 아래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소원의 끝의 끝까지 걸어가봐야 했기에.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소원의 가장 깊은 곳에는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바스티안은 에욜라 부인의 집에 머물며, 잃어버린 어머니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조건 없는 돌봄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또한 ‘진짜 소원(True Wish)’은 아니었다. 바스티안은 다시 길을 떠나 ‘그림 광산(Picture Mine)’에 이른다. 인간들이 잊어버린 수많은 기억의 이미지들 가운데, 자신을 ‘생명의 물(Water of Life)’로 이끌어줄 단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내야 했다. ‘타인’에게서 비롯된 소원의 끝에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기억으로 돌아가 ‘내가 결코 잃고 싶지 않은 기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한 장의 그림은 짙은 슬픔에 잠긴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바스티안이 이제는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머릿속의 기억은 사라졌어도, 누군가를 사랑했던 감각만큼은 바스티안 안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바스티안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소원을 발견한다.
ㅡ 바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To be able to love.
하지만 바스티안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결정적인 순간,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아트레유다. 한때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친구, 그러나 질투심에 눈이 멀어 깊은 상처를 입혔던 바로 그 친구가, 바스티안 자신조차 잃어버린 그의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고 불러준 것이다.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생명의 물에 이르고, 판타스티카에서 덧입었던 허울을 모두 벗어던진 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처음 판타스티카로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바스티안이었지만, 내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야기 속을 통과해 현실로 돌아온 그는 이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진짜 소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향하는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과 슬픔 속에 갇혀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두 사람은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연다. 그리고 바스티안은 자신이 겪어낸 그 기나긴 여정을 비로소 아버지에게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주기 시작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났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것은 이야기 속 두 번의 ‘이름 부르기’였다. 첫 번째 이름 부르기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고, 두 번째 이름 부르기는 자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했다. 전반부에서 바스티안은 소멸해 가던 어린 여왕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불러줬고, 여왕과 판타스티카는 새롭게 호흡하며 되살아났다. 이야기의 끝자락에서는 친구 아트레유가 바스티안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 그 호명 덕분에 바스티안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자신이 떠나왔던 제자리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맞닿아 있다. 이야기는 누군가를 되살려낼 수도 있고, 길 잃은 존재를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힘은 때때로 선의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바스티안이 판타스티카의 다른 존재들의 이야기에 섣불리 개입했을 때, 예상치 못한 끔찍한 비극들이 초래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끝없는 이야기(The Neverending Story)』라는 이 책의 제목 역시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로 변주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첫 번째는 방랑산의 노인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야기는 책의 표지 속 그림처럼 자기 꼬리를 무는 뱀과 같이 시작과 끝을 삼키며 완벽하게 닫힌 원을 만든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새롭게 시작될 수 없는 끔찍한 굴레이기도 했다. 이 숨 막히는 닫힌 원을 깨뜨린 것은, 두려움을 뚫고 어린 여왕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불렀던 바스티안의 용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사는 전혀 다른 차원의 또 다른 ‘끝없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다. 이번에는 갇힌 채 맴도는 ‘반복’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무한히 뻗어나가는 ‘이어짐’이다. 아트레유는 스스로 하나의 아름다운 ‘긴 이야기’가 되었고, 그 이야기는 바스티안을 초대해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고, 바스티안의 이야기는 다시 아트레유를 초대하며, 스스로 이야기가 된 바스티안은 현실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으로, 삶이 또다시 이야기로 쉼 없이 그 꼴을 바꾸며 이어지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 ‘이어짐’이야말로 진정한 『끝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편, 최근 읽기 시작한 C. S. 루이스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과 겹쳐지는 지점들도 있어 몹시 흥미로웠다. 흔히 기독교 변증가로 알려진 루이스는 회심 이전부터 북유럽 신화와 전설, 고전 문학에 깊이 매혹되어 있었고, 철학과 문학, 언어와 역사에 걸쳐 방대한 지적 세계를 지닌 사람이었다. 『예기치 못한 기쁨』은 그런 점에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라는 단편적인 타이틀 뒤에 숨어 있던 다채롭고 매력적인 한 인간의 지적 층위를 발견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물론 방대한 인문학적 레퍼런스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탓에,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무엇보다 이 책과 연결해볼 만한 지점은 루이스의 ‘이야기’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신화와 전설, 시와 이야기, 음악과 자연을 접할 때 그는 종종 현실에서는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깊은 ‘갈망’을 경험했고, 그 갈망이 문득 깨어나는 특별한 경험을 훗날 ‘기쁨(Joy)’이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영어의 한 단어로는 온전히 옮기기 어려운 독일어 Sehnsucht가 품고 있는 정서와도 가까운, 마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듯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깊은 그리움과 동경이었다. 그리고 루이스에게 신화와 이야기는 바로 그 ‘기쁨’을 반복해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에게 ‘이야기’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자기 바깥의 어떤 실재를 어렴풋이 감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체험에 가까웠다. 마치 잠시 열렸다 닫히는 창문 너머로, 지금 여기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세계를 순간적으로 엿본 것처럼.
루이스가 회심에 이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 가운데 하나 또한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작가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J. R. R. 톨킨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과의 대화를 통해 루이스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온 신화와 기독교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훗날 이를 “Myth became fact.(신화가 사실이 되었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이 말은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가 더 이상 책 속에 머물지 않고 바스티안 자신의 삶이 되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또한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하며 ‘이야기’라는 형식이 추상적인 명제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것을 독자가 생생히 상상하고 느끼게 하는 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런 면에서 바스티안의 여정 역시 그러하다. 아트레유의 이야기는 바스티안이라는 한 사람을 긴 서사 속으로 초대해, 현실에서는 끝까지 가볼 수 없는 욕망의 끝까지 가보고, 자신을 잃어보기도 하고, 마침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한다. 어떤 진리를 바깥에서 설명하는 대신, 그것을 한 번 살아본 것처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루이스와 엔데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이스에게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와 진리를 감지하게 하는 통로에 가까웠다면, 엔데에게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이 잃어버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창조적인 힘에 가까워 보인다. 사상적 배경 역시 다르다. 루이스가 회심 이후 분명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했다면, 엔데의 사상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신비주의와 카발라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철학적 전통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던지는 질문에는 어쩐지 닮은 데가 있다고 느껴진다. 인간은 과연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이야기’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북클럽에 새롭게 덧붙인 ‘Stories’ 섹션에 대한 설렘, 나의 오랜 회귀점인 ‘이야기’라는 존재, 우연히 펼쳐 든 C. S. 루이스의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 그리고 9월의 북클럽 책 『끝없는 이야기』까지. 8월의 마지막 즈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야기’라는 하나의 주제로 포개어진 이 우연한 만남들은 두바이로 돌아온 뒤에도 다소 남아 있던 허전함과 그리움, 짙은 여독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결국 이야기가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소중한 능력 중 하나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닐까. 바스티안의 마지막 진짜 소원(True Wish)이었던 ‘사랑’에도 어쩌면 그런 상상력이 필요한지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우주가 지나온 아득한 시간과 그 깊고 무한한 마음의 별들을 가만히 헤아려보는 일. 비록 두 눈으로 마주 볼 수는 없어도, 바람의 결을 느끼듯 따뜻하게 닿아오는 마음의 온기를 감각하는 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으며, 기꺼이 그 너머의 세계를 그려볼 줄 아는 상상력. 만약 우리에게 그런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영영 완전한 사랑을 품은 세계에 닿지 못할지도 모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