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으로 이해해 보는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자카란다(Jacaranda) 꽃과 나무
앤드류 포터(Andrew Porter)의 소설 세계에서 공간과 자연은 인물의 심리를 투영하는 정교한 장치로 등장한다. 특히 그의 첫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에 수록된 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카란다(Jacaranda) 나무는 단순한 배경의 장식을 넘어선 문학적 모티브다.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미국의 중산층 교외(suburb)나 동부 부촌이라는 공간은, 과거 도금 시대(Gilded Age)부터 이어진 화려한 저택들이 즐비한 곳이자 미국의 황금기에 쌓아 올린 부(富), 그리고 유럽 본토에 대한 묘한 열등감이 뒤섞인 역사적 정서를 품고 있다. 이는 마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이 모든 성공을 이루고도 강 건너의 초록색 불빛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던 것처럼, 근본적인 공허함이 내재된 미국의 전형적인 부촌의 풍경이기도 하다.
앤드류 포터는 단편 특유의 절제된 호흡 속에서 마치 관찰하듯 인물들과 그들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밀착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자카란다 나무를 배치함으로써, 인물들이 지닌 내면의 구멍과 막연한 상실감을 활자가 다 전하지 못하는 깊은 정서로 한층 더 느끼게 해준다.
자카란다 나무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침묵 속에 썩어가는 인물들의 고독을 감각적으로 구현해 내는 강렬한 시각적 장치다.
지난달 북클럽에서 함께 읽었던 미하엘 엔데의 소설 『끝없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간주나무가 뾰족하고 투박한 외양보다는 독일 전래동화나 성경에서 비롯된 소생과 부활의 ‘의미’로 다가오는 문학적 상징이었다면, 앤드류 포터 소설 속 자카란다 나무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라색 꽃들의 시각적 찬란함 아래 오히려 더 싸늘하게 식어가는 인물들의 고통과 단절을 서늘한 대비로 보여준다. 이는 마치 홀로 있을 때보다 화려한 잔치 한복판에서 더 지독한 고독을 느끼며 겉도는 사람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처럼 자카란다 나무는 교외 생활의 완벽한 외양과 그 이면에 감춰진 위선을 상징한다. 포터의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여러 동네에서 인물들은 자카란다 나무가 심어진 집을 떠올린다. 그 나무는 마치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안식처’, 혹은 소설 속 ‘파랑새’처럼 이상적인 무언가를 꿈꾸게 만들지만, 실상 그들이 바라는 완벽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편 『피부(Skin)』에 등장하는 자카란다 나무 역시 파국을 앞둔 부부의 쓸쓸한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다. 포터는 자카란다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인물들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내면의 붕괴와 교외 사회의 정서적 기만을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러한 괴리감은 단편 『아술(Azul)』에서 자카란다 나무의 ‘꽃향기’를 통해 한층 더 감각적으로 확장된다. 실제로 자카란다 꽃은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때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지만, 막상 바닥에 떨어져 젖은 꽃이 미끄럽고 뭉개지면 쿰쿰한 냄새를 내뿜는 반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향기의 돌변을 통해,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지만 실상은 진짜 부모도 자식도 아닌 채 서성이는 그 묘한 관계성 속의 단절과 공허함을 후각적으로 고스란히 투영해 낸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미국 동부 지역에서 자라난 앤드류 포터의 경험을 추측해 보건대, 그는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The Stepford Wives)』에 나오는 것과 같은 완벽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 숨 막히는 관계의 단절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영화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커네티컷주의 부촌 ‘스텝포드’는 대도시 스탬퍼드(Stamford) 근처의 실제 마을들을 모델로 한 가상의 공간이며, 겉만 화려한 가정의 내부를 비틀어 꼬집는다는 점에서 포터의 소설 속 공간과 일맥상통한다.
언제나 누가 보기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 이웃과 갓 구운 파이나 쿠키를 나누고 지나가며 높은 톤으로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문화 뒤에는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타인을 은밀하게 배척하는 괴리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카란다 꽃은 피어 있을 때의 화려함만큼이나 질 때 바닥을 물들이는 인상이 대단히 강렬하다고 한다. 자카란다는 꽃잎 자체에 수분과 당분이 많아 떨어져 짓밟히는 순간 거무스름하고 끈적끈적한 진흙처럼 변하며 지우기 힘든 얼룩을 남기는 까다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멀리서 보면 환상적인 보라색 카펫 같지만, 막상 그 아래로 걸어 들어가 발을 디디면 끈적이고 지저분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현실에서도 정작 “내 집 앞마당에는 심기 싫은 나무”로 손꼽힌다고 한다.
보라색 꽃잎들이 무수히 떨어져 아스팔트와 잔디 위를 덮어버리는 이 무덤 같은 모습은, 소설 속 인물들이 ‘상실’과 ‘위선의 실체’를 생생하게 자각하는 순간과 궤를 같이한다. 인물들은 발아래 뒹구는, 이미 오염되고 바스러진 꽃잎을 바라보며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버린 과거의 연인이나 복원할 수 없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성장기의 미국 동부를 벗어나 현재 텍사스에 정착한 앤드류 포터는 과연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저마다의 공허한 구멍을 가진 존재이며, 그 고통으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수밖에 없다는 본질적인 비관주의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텍스트의 내용만으로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인간 내면의 어둠을 특유의 색채나 날씨와 계절이라는 감각적인 장치로 더듬어 보며 가슴 한구석에 은근하면서도 묵직하게 밀려오는 뜻밖의 놀라움을 느끼게 한 독서의 경험이었다.
01 함께 생각해볼 질문
Q. 이 책을 정말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이해하기 싫은 것인지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가 참 애매하다. 피해자들이 솔직하게 적어가는 일기장 같다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가해자들이 교묘하게 털어놓는 사건의 재구성 같기도 하다. 달콤한 향기를 지닌 자카란다 나무의 보라색 꽃 이면의 진실은 무엇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 하는 고백과 변명을 잘 구별하며 살고 있나? 나는 내 사고의 허점과 기억이 일으키는 굴절을 잘 인식하며 사는가? 나는 나 자신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가? 내가 온전한지 알 수 있는 나만의 척도가 있는가?
02 이어서 읽어볼 만한 책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일상적인 거실의 침묵이나 차가운 공기를 통해 소통을 잃어버린 인물들의 정체된 삶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앤드류 포터에게 큰 영향을 준 작가의 작품.
리처드 예이츠, 『혁명의 도로』
화려한 교외 부촌의 외양과 그 이면에 가려진 부부간의 철저한 소통 마비와 파국을 다루어, 포터가 그려낸 위선의 정서와 강하게 맞닿아 있다.
켄 하루프, 『플레인송』
황량하고 삭막한 시골 마을의 겨울 평원을 배경으로 하지만, 외딴섬 같던 이들이 투박하고 따뜻한 행동으로 서로를 품으며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브리엘 제빈, 『섬에 있는 서점』
퉁명스럽고 까칠하게 고립을 자처하던 주인공이 책과 이웃을 매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다정한 온기를 회복해 나간다.
03 오차드 북 큐레이터의 추천책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및 올리브 키터리지 유니버스의 모든 소설
뉴잉글랜드의 쓸쓸한 바닷바람이나 병실의 외로운 풍경 속에서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깊은 애정과 서툴지만 절절한 사랑의 가능성을 증명해 낸다. 알고 보면 따뜻함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