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해서 가능하고, 있을 수 없어서 있을 법한 일
나는 여행을 퍽 즐기는 편이다. 누구나 할 법한 이야기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에 가 보고, 들어 본 적 없는 언어를 들어 보고,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을 맛보고, 본 적 없는 경치를 보고, 그 도시가 가진 냄새를 맡는 걸 좋아한다.
내가 소설을,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도 나는 여전히 나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마저도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행을 가서 그곳을 거닐다 보면 흔히 비현실적(surreal)이라는 생각과 느낌이 든다. 특히 그곳이 한 달 전, 두 달 전에는 내가 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한 곳일 때는 더더욱! 그곳에서는 사실은 아주 현실적이지만 나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일들이 곧잘 일어나곤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허겁지겁 담배 연기 냄새 가득한 튀르키예의 공항을 벗어난다. 짐을 풀어 놓고 물이라도 한 병 살까 숙소를 나와 터덜터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지중해의 비현실적으로 푸른 하늘과 바다가 보인다든가. 또 어느 여행에서는 밤새 모기 소리와 감기 기운에 시달리며 고요하지만 시끄러운 정글 한가운데 있는 호텔에서 밤을 보내고, 나무 사이로 찌르고 들어오는 햇살에 겨우 눈을 떴을 때 코끼리가 창문 앞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든가 말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인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복잡한 이름의 심리적 기제가 이미 명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저에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소설이라는 비현실에서 가장 현실적인 경험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소위 말하는 장르소설, 그중에서도 판타지소설을 좋아한다. 그곳에는 반드시 새로운 세계가 있고, 경험해 보지 못한 마법과 한 번도 보지 못한 놀라운 생물들이 새로운 규칙과 세계의 구성 아래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접한 판타지는 J.R.R. 톨킨의 『호빗』이었다. 집을 떠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질색하던 호빗 빌보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난쟁이들에게 떠밀리듯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돌이켜 보면 여행을 퍽 즐기는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때, 빌보를 따라 둥근 초록 문을 나서던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 『로도스도 전기』를 지나 『드래곤 라자』에 이르기까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다. 지도 한 장 없이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이야기가 나를 인도했으니.
요즘에는 좀 덜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른이 장르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운, 조용한 고해성사 같은 것이다. 다 커서 그런 것이나 읽고 좋아한다니, 쯧쯧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딱히 있는 건 아니다(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짚어 두고 싶다). 그런데도 그 소설들에 남몰래 누리는 즐거움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숨겨 온 사람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반가움은 유난하다. 대화 중에 누군가 무심코 흘린 한 단어에 눈이 마주치고, 조심스레 “혹시… 그거 읽으셨어요?” 하고 묻는다.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좋아하던 인물과 가장 마음 아팠던 장면, 아직도 외우고 있는 대사를 두서없이 쏟아 내다 보면, 처음 본 사이인데도 마치 동향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하긴, 같은 세계를 함께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니 정말로 동향이라고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고해성사는 어느새 반가운 고백이 된다.
이 글은 내 어린 시절의,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랑하는 소설들을 위한 변론이다.
사람들은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나의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해 보려 한다. 앞에서 꽤 길게 설명했던 것처럼, 적어도 나에게 소설은 마치 여행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나의 일상에서는 해 볼 수 없는 경험과 감정을 느껴 보는 것.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표출하며 살아가지만, 어떤 감정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 그리고 아주 특정한 사람과 분위기가 필요하곤 하다. 같은 장소를 같은 사람과 가더라도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과 경험이 다른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소설로 엮어 낼 수 있는 감정과 경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기반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작가가 보여 주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함께 나누고 싶은 경험을 전하는 매체이다.
어떤 감정이 특정한 장소와 시간,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작가는 그 감정이 가장 잘 태어날 수 있는 장소와 시간, 사람을 직접 만들어 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수많은 평행우주를 만들어 내는 모종의 창조 행위를 하는 셈이다. 여러 평행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한 끗만 다를 수도, 모든 것이 다를 수도 있는 것처럼 소설의 세계도 그러하다. 작가는 자신이 나누고 싶은 경험과 감정, 이야기가 가장 잘 펼쳐질 세계를 만들어 간다.
작가들은 때로 먼저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반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나 나누고 싶은 감정과 경험을 먼저 떠올리고, 그것을 가장 잘 담아낼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두 축 사이의 밀고 당기기일지도 모른다. 개중 매력적인 세계는 때론 훌륭한 파생 이야기들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톨킨이 만든 중간계가 이후 수많은 판타지 소설과 게임이 빌려 쓰는 토대가 된 것처럼. 판타지나 공상과학—이 이름마저도 꽤 어마어마한 악의가 느껴지는 이름이 아닌가. 空想, 비어 있는 생각이라니!—추리 등 여타 장르소설 또한 같은 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소설이든 당연하게도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 있고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잘 읽히고 몰입감이 높은 소설은 그것이 상당 부분 우리의 현실을 차용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상관없이 대체로 "있을 법한" 것이기 마련이다.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이 "있을 법한"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 있을 법한"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의 규칙 안에서 있을 법한"에 가깝다. 개연성이라는 말도 사실은 이 "세계 안에서 있을 법함"을 가리키는 것이고, 앞서 말한 안타깝게도 완성도가 높지 않은 소설에서 쉬이 볼 수 있는 특징이 바로 이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99.99%가 같든, 0.01%가 같든, 중요한 건 그 세계 안에서 있을 법한 일인가 하는 점이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개미는 저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데 무엇을 하는 것일까, 무슨 생각일까, 내가 어릴 때 장난으로 개미를 집어 올릴 때 개미에겐 내가 어떻게 보일까. 사실 개미가 그 소설에서 하는 차원의 사고가 가능할지는 좋게 말해서 알 수 없고,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한가와는 무관하게, 그 세계 안에는 분명 진짜 감정과 있을 법한 행동과 경험들이 있다.
이렇게 있을 수 없어서 있을 법한 일들과, 불가능해서 가능한 일들이 있다. 현실의 시각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설정이나 세계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앞서 말했던 아주 특정한 감정 말이다. 마치 테트리스를 하는데 갑자기 3차원의 구형 조각이 나와서, 그 조각을 맞추기 위해 테트리스에 차원을 추가하는 것처럼. 개미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개미가 되어 느끼는 군집체의 일원으로서의 사명감과 흰개미들과의 전쟁에서 개미산을 쏘며 맡을 수 있었던 알싸한 냄새. 더듬이로 전해지는, 어쩌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화학적인 일체감. 그리고 분홍빛 공(사람의 손가락이 이렇게 표현된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이 감정과 경험들이 매력적인 것은 개미가 되어 생각해 보면 그럴 법하고,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감정과 경험들과도 접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개미에 이미 동화된 독자에게는 진짜 경험이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소설로 일컬어지는 소설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세계에서 차용한 것이고, 판타지나 공상과학소설도 결국 같은 스펙트럼 위에 놓인 서로 다른 점들일 뿐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사람이 벌레가 되는 이야기이지만 고전문학이고, 『개미』는 벌레(개미)에게 자아와 사고를 주었다는 이유로 공상과학소설이 된다. 같은 벌레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이 차이는 여러 요인에서 오지만, 흔히 장르소설이 가볍게 읽는 사건 위주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데서 비롯되는 부분도 크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PC통신 연재와 도서대여점을 중심으로 판타지 붐이 일면서, 빠르게 쓰이고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라는 인상이 굳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처럼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이 태어난 것도 바로 그 자리였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에 일부 작품의 낮은 완성도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지적에 SF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이 “무엇이든 90% 정도는 쓰레기다”라고 답한 일화는, 그 비율에는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상당 부분 수긍할 만한 말일 것 같다. 앞서 개미의 세계에서 본 것처럼, 장르소설이 궁극적으로 건네는 것도 ‘사건’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퍽 좋아한다. 그 여행이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로 가는 여행일지, 누군가가 나에게 너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고심해서 만들어 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일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이건 어른이 되어서도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놓지 못하는 한 독자의 변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