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와 무화과좀벌
개인적으로 나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이 참 많다고 믿는 편이다. 흔히들 광활한 우주를 올려다보며 이 의기양양한 인류가 얼마나 아는 것이 없고, 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다지만, 나는 지구의 작은 생명체들을 들여다볼 때 비슷한 감각을 느낀다.
성영은 작가의 『파브르의 안경』을 읽을 때도 그랬고, 북클럽 멤버들과 연신 감탄하며 넘겼던 김민식 작가의 『나무의 시간』에서도, 그리고 너무나 흥미롭게 빠져들었던 호프 자런(Hope Jahren)의 『랩 걸(Lab Girl)』을 덮을 때도 늘 같은 생각에 도달하곤 했다. 그 작고 정교한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인간이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숙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 무화과라는 화두로 머릿속이 꽉 차 있던 시기. 대체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 이 무화과나무의 정체는 무엇이냐며, 주명 언니에게 나의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언니는 내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건넸다.
“석인 씨, 저는 예전에 무화과가 꽃 피는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열매를 맺는다고 들어서 왠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든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꽃이 없는 게 아니라, 밖으로 안 보일 뿐이래요. 꽃과 열매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껍질 안쪽으로 남몰래 꽃을 피워내는 거라고요.”
이럴 수가.
무화과(無花果). 한자 뜻 그대로 ‘꽃이 없는 과일’이라고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꽃이, 안으로 핀다고?
가벼운 충격에 휩싸인 내게, 언니는 언젠가 그렸다는 무화과 그림과 함께 필사되어 있는 김지하 시인의 시 「무화과」를 보내주었다.
이봐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우선 밝혀두자면, 이 글은 Mike Shanahan의 저서 『Gods, Wasps and Stranglers: The Secret History and Redemptive Future of Fig Trees』을 참고했다. 직역하자면 ‘신들과 벌과 교살자들: 무화과나무의 숨겨진 역사와 회복의 미래’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 이 책과, 그 외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새롭게 알게 된 무화과의 세계를 촘촘히 기록해두려 한다.
미리 고백하건대, 나의 모든 글이 늘 그렇듯 이 글 역시 꽤나 길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무화과의 신비와 아름다움, 그리고 경이로운 발견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내게는 참 소중한 오래된 꿈과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들이 나를 이끌어 발견하게 한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도 꼭 함께 가주면 좋겠다.
01 무화과나무, 그리고 그늘
무화과속(Ficus)은 800종이 넘는다. 종류만 많은게 아니라, 형태의 스펙트럼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일 정도로 넓어서, 덩굴처럼 타고 오르는 종부터 30m 거목, 숙주를 칭칭 감아 죽이는 ‘교살자 무화과(strangler fig)’까지 존재한다. 이토록 방대한 세계 중, 고대 근동의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 기록해둘 두 종이 있다.
Ficus sycomorus (돌무화과나무)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반도 일대에 분포한다. 대략 10~20m까지 자라며 가지와 수관을 넓게 펼쳐 여러 사람이 들어갈 만한 거대한 그늘을 만든다. 고대 근동을 배경으로 한 성경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한국어 성경에서는 번역본과 본문에 따라 ‘뽕나무’로 옮겨지기도 한다. 열매는 일반 무화과보다 작고 덜 달다. 영문명은 sycamore-fig다. 삭개오가 올라간 바로 그 나무이며, 선지자 아모스가 돌보던 나무이기도 하다.
Ficus carica (일반 무화과나무)
달고 과육이 꽉 찬,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보라색 무화과가 열리는 종으로,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fig tree)’라 일컫는 나무다. 3~10m 정도로 크기는 앞선 종에 비해 작지만, 잎사귀가 넓고 가지를 옆으로 뻗어 한두 사람은 물론, 사람들이 삼삼오오 들어가 쉬어갈 만한 그늘을 내어준다.
고대 근동에서 무화과나무는 단순한 과실수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건조하고 뜨거운 사막 기후 속에서,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 한 잎들이 무성하게 겹쳐 만든 수관은 완벽한 천연 파라솔이었다. 무려 기원전 13세기, 고대 이집트의 한 사랑시에는 돌무화과나무가 사람들에게 ‘내 그늘로 와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라’며 말을 건네고, 신화 속 ‘무화과 여신’은 열기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그늘과 물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생활 공간이었다. 랍비들과 학자들은 이 짙은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율법을 읽고, 묵상하고, 토론했다. 말하자면 돌무화과나무 아래는 자연이 만들어낸 야외 교실이자, 지적인 사유가 오가는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일반 무화과나무 역시 그보다 작은 규모로나마 사람이 그 아래 들어가 쉬고 머물 수 있는 그늘을 내어주었다.
02 오래된 미스터리
인간은 무화과를 최소 1만 년 이상 재배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인류의 역사와 길게 밀착되어온 과일이지만, 이 나무에는 오랜 미스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꽃이 피지 않은 채 열매가 맺힌다’는 점이다.
보통 식물은 꽃에서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에 닿아 수정이 이루어지고, 그 씨방이 커져 열매가 된다. 그런데 무화과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 꽃이 피는 과정을 건너뛴 채 열매가 맺히니, 고대인들의 눈에도 이 현상이 꽤나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식물계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처럼 보인 셈이다.
그래서 고대 힌두와 불교에서는 ‘무화과나무에서 꽃 찾기’를 가망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썼고, 벵골어에는 ‘무화과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관용구가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예 이름 자체를 꽃이 없는 과일, 즉 무화과(無花果)라고 지어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인류가 이 생식의 ‘원리’는 모른 채 ‘현상’만 이용하여 수천 년간 무화과를 재배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모른 채 열매를 거둬왔던 것이다. 무화과 생식의 복잡한 비밀이 밝혀진 것은 근대 식물학이 발달한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방법은 알지만 원리는 몰랐던 수천 년….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떠오른 것은 ‘발효’였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발효를 통해 빵과 와인을 만들어왔다. 빵 반죽을 남겨두었다가 사용하면 빵이 부풀어 오르고, 포도를 으깨두면 어느 순간 발효되어 술이 된다는 ‘방법’은 알았지만, 정작 효모라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누룩으로 술을 빚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무화과도, 발효도 인류가 수천 년을 곁에 두고 이용해왔지만, 그 정확한 원리는 놀랍게도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03 무화과좀벌
여기서 무화과나무의 생애에 독보적으로 중요한, 1~2mm 남짓한 작은 생명체 ‘무화과좀벌’이 등장한다. 고대인들도 이 벌과 무화과 사이에 모종의 친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 기록에도 이 둘의 연결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벌이 무화과 안으로 들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 사이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했듯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이 무화과와 무화과좀벌의 상호관계는 대략 6천만~8천만 년 전, 즉 백악기 후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기도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무화과와 무화과좀벌은 서로의 생애에 깊숙이 들어와 얽혀 있었던 것이다.
04 안으로 피는 꽃
이제야 본격적으로 무화과 열매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먹는 ‘무화과’는 엄밀히 말해 단일한 하나의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속이 빈 둥근 방, 혹은 입구를 오므린 항아리에 가깝다. 이 독특한 구조를 시코늄(syconium)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안쪽 벽 전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꽃들이 수없이 빼곡하게 피어난다. 그러니까 무화과는 꽃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껍질 ‘안으로’ 피어났을 뿐이다.
안으로 핀 꽃들이 수정되면 각각의 씨방은 아주 작은 열매가 되고, 밑씨는 씨앗이 된다. 그렇게 생겨난 수많은 작은 열매와 씨앗, 그리고 그것을 둥글게 감싸 안은 보라색 두툼한 껍질. 그 모든 조직들의 경계 없는 총합이 비로소 우리가 베어 무는 하나의 ‘무화과’가 된다. 하나의 꽃이 자라 하나의 과일이 되는 보통의 공식과는 다르다. 수백 개의 꽃과 열매, 그리고 그것들을 안으로 품어낸 ‘공간’ 전체가 통째로 하나의 몸처럼 자라나는 구조다.
어느 하나만 떼어내어 무화과라 부를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품어낸 전체가 곧 무화과다. 요컨대, 무화과는 단일한 하나의 열매라기보다 그 자체로 둥근 하나의 ‘세계’인 셈이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기 수천만 년 전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던 이 세계는, 단지 인간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안을 들여다볼 재간이 없었고 그 세계를 해석해내지도 못했기에, 그저 오랫동안 겉모습만 보고 꽃이 없는 과일, 무화과(無花果)라고 오해하며 불렀을 따름이다.
05 특별한 결속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하다 못해 극도로 전문화된(specialized) 결속이다. 수천만 년 전 무화과의 조상은 여느 식물들처럼 지금보다 훨씬 밖으로 열린 형태의 꽃을 피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무화과좀벌이라는 특정 곤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세대를 거듭하는 동안, 이 나무는 굉장히 신기하고 독특한 선택을 한다.
꽃받침 구조를 안으로 오므리더니, 끝내 항아리처럼 꽃을 둥글게 품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직’ 무화과좀벌만이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꽃의 ‘건축’ 자체를 통째로 바꿨다. 완벽하게 맞물려야만 열리는 자물쇠와 열쇠(lock-and-key)처럼 말이다.
수많은 식물이 그토록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진화론적 이유는 명백하다. 다양한 벌과 나비를 유혹해 꽃가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무화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꽃을 안으로 숨기고 입구를 닫았다. 그리고 그 틈새를 통과할 수 있는 무화과좀벌에게만 자신의 생명, 즉 수분을 온전히 맡겼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극도로 전문화된 동식물 간의 의무적 상리공생(obligate mutualism)’ 가운데 하나로 본다. 무화과는 좀벌 없이 수정할 수 없고, 좀벌은 무화과의 꽃 내부가 아니면 번식할 수 없다. 한 생명의 생애가 다른 생명의 생애 안으로, 통째로 포개져버린 것이다.
아주 단순화하면 이렇다. 꽃가루를 묻힌 무화과좀벌이 무화과 끝의 비좁은 구멍으로 들어와 안쪽에 숨어 있는 꽃들을 수분시킨다. 번식이 가능한 숫무화과에서는 그 안에 알을 낳고 자신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 알에서 태어나 자란 무화과좀벌들은 다시 꽃가루를 몸에 묻힌 채 밖으로 빠져나와, 또 다른 무화과를 찾아 비행을 시작한다.
06 공간을 넘는 연대성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빚어진다. 얼핏 보면 무화과와 무화과좀벌의 관계성은 너무도 전적이고 폐쇄적이기에 생존 논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수분자가 다양한 다른 식물들의 번식 전략과는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배타적인 관계에서 가장 놀라운 일들이 잉태된다.
일단, 무화과좀벌은 몸길이가 1~2mm 정도로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작다. 그런데 일부 열대 무화과좀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평균 10km 이상의 장거리 이동을 거뜬히 해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대 100km를 넘는 이동까지 발견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나는 글을 잘못 읽었나 했다.
10km면 인간이 걸어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성충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고작 며칠에 불과한 2mm의 생명체가, 그 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이다. 2mm의 몸으로 10km를 간다는 것은 자기 몸길이의 500만 배를 이동하는 일이다. 인간의 몸집으로 환산하면 대략 8,500km, 거의 대륙 하나를 건너는 거리다. 하물며 100km라면, 같은 방식으로 환산했을 때 무려 85,000km. 지구를 두 바퀴 넘게 도는 거리다. 아무리 바람을 타고 간다고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 말도 안되게 놀라운 여정은 무화과좀벌의 생애가 오직 무화과속 나무에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수분자들은 가까운 곳에 피어난 여러 꽃을 옮겨 다니며 단거리 여행을 한다. 하지만 무화과좀벌은 다른 도시를 넘어서라도 — 정확히는 대륙을 넘어서라도 무화과나무를 찾아간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무화과나무들 사이의 ‘공간을 넘는 연대성’은 어마어마하다.
인간이 걸어서 두 시간이 넘는 거리, 차로 달려도 20분은 족히 걸릴 거리에 떨어져 있는 나무들이 거대한 하나의 번식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를 오가는 2mm의 작은 생명체 하나가 꽃가루를 옮기며 이들을 묶어준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전적 공동체’로 말이다.
07 폭발적인 다양성
이 배타적이고 전적인 결속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폭발적인 다양성’이다. 무화과나무와 무화과좀벌은 수천만 년 동안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며 함께 진화해왔다. 서로가 서로의 생존과 번식 방식에 영향을 주며 변화해온, 이른바 ‘공진화(coevolution)’의 관계다. 흥미로운 건, 이 극도로 폐쇄적이고 전문화된 관계가 오히려 거대한 종의 분화를 촉진했다는 점이다. 무화과속의 자매 계통인 카스티예아(Castilleae) 식물들이 고작 60여 종에 머물러 있는 반면, 무화과속은 오늘날 무려 800종이 넘는 거대한 집단으로 뻗어나갔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좀벌의 그 ‘장거리 비행’ 역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 떨어진 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꽃가루를 나르는 이 작은 벌 덕분에, 무화과는 물리적 거리에 고립되지 않고 세계 곳곳의 낯설고 다양한 환경으로 퍼져나가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자들이 진정으로 감탄하는 지점은 이 800여 종의 스펙트럼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은 그저 잎사귀 모양이나 크기가 조금 다른, 비슷비슷한 나무들이 아니다. 수십 미터의 거대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무릎 높이의 작은 관목도 있고, 덩굴처럼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는 종, 아예 남의 굵은 가지 위에서 삶을 시작하는 종, 숙주나무를 칭칭 감아 숨통을 끊어버리는 ‘교살자 무화과(strangler fig)’도 있다. 얼핏 보면 도저히 같은 식물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삶의 형태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바로 이다음이다. 그토록 극단적으로 다른 생존 방식을 선택해 제각기 분화했으면서도, 이 800여 종의 식물들에게는 수천만 년 전의 오래된 구조 하나가 공통으로 남아 있다. 꽃을 안으로 숨긴 구조, 그리고 그 둥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작은 벌과의 특별한 결속이다.
08 생태의 살림
이 폭발적인 다양성은 이제 숲 전체를 먹여 살리는 구체적인 생태의 동력이 된다. 실제로 열대와 아열대 생태계에서 무화과속은 먹이망 전체를 든든히 떠받치는 핵심 자원(keystone resource) 역할을 한다. 그 힘은 철저히 ‘다양성’에서 나온다. 수백 종의 무화과나무가 저마다 다른 크기와 형태의 열매를 맺으며, 각기 다른 동물들에게 먹이가 되어주는 것이다.
수치로 보면 아득할 정도다. 2001년 기준, 전 세계 조류의 10% 이상, 포유류의 6% 이상이 무화과를 먹는다. 종 수로 따지면 새 990종, 포유류 284종 등 총 1,274종에 달하며, 여기에 일부 파충류와 물고기까지 가세한다. 원숭이, 박쥐, 코끼리, 사슴, 멧돼지, 코뿔새, 앵무새에 이르기까지 열대의 과식동물(frugivore)에게 무화과는 가장 중요한 식물군 가운데 하나다.
요컨대, 무화과의 생애에는 극단적인 폐쇄성과 개방성이 공존하는 생의 방식이 숨어 있다. 수정의 단계에서는 무화과좀벌이라는 극도로 제한된 생명체에게만 문을 열어주는 전적으로 배타적인 관계에 의존하지만, 열매를 맺고 나면 그 세계는 경이로울 만큼 넓게 확장된다.
수많은 동물이 모여들어 무화과를 먹고, 숲을 누비다, 다시 낯선 땅 곳곳에 퍼뜨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다양한 무화과 종들과 개별 나무들은 저마다 열매를 맺는 시기가 다르다. 덕분에 숲에서 다른 과일을 찾기 힘든 혹독한 계절에도, 무화과는 어느 편에선가 열매를 내어주는 경우가 많다. 문자 그대로 숲과 동물, 생태계 전체를 지탱하는 든든한 살림꾼이 되는 것이다.
09 단위결과성 과일
이처럼 무화과나무는, 지금껏 알려진 식물 중에서도 가장 ‘극도로 관계적인 식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무화과좀벌이라는 극히 제한된 생명체에게 자신의 번식과 생명을 온전히 내맡기고, 무화과좀벌의 비행을 통해 10km 이상 떨어진 나무들과 유전적으로 결속하며, 숲속 수많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 거대한 생태계와 연결된다. 그런데 정말 말도 안 되게, 이 관계의 고리를 끊어버린 무화과도 존재한다. 굉장히 신기한 지점이다.
바로 ‘단위결과성(parthenocarpy)’을 띠는 개체들이다. 수분이나 수정 없이도 과실이 발달하는 현상이다. 말하자면 자연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이의 일종인데, 모든 과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친숙한 사례가 바나나다. 야생 바나나는 단단한 씨앗을 품고 번식하지만, 자연에서 씨앗이 없으면서도 과육만 발달하는 개체들이 나타났고, 인간이 이런 특성을 가진 바나나를 골라 오랫동안 번식시킨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바나나다.
흥미롭게도 무화과에서도 이런 단위결과성 개체가 드물게 나타난다. 게다가 무화과는 가지를 잘라 심는 꺾꽂이, 정확히는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를 복제하는 번식이 아주 쉬운 식물이라, 인간은 고대부터 이런 ‘씨앗 없는’ 개체들을 꺾꽂이로 번식시켜 길러왔다.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사 먹는 생무화과 품종 상당수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벌의 도움 없이 열매를 키운 것들이다.
겉모습과 맛은 완벽하게 똑같다. 하지만 수정의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생명력을 품은 진짜 씨앗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화과좀벌이 들어와 꽃가루를 묻힐 필요도, 멀리 떨어진 다른 나무와 유전적으로 연결될 필요도 없다. 동물들이 달콤한 과육을 따 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새로운 무화과나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번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맛있는 과일은 되지만, 무화과라는 식물 자체의 경이로운 세계 속 놀라운 관계성도, 공간을 넘나드는 연대성도, 확장성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단위결과성(parthenocarpy)’이라는 생물학 용어 자체도 그리스어로 ‘처녀’를 뜻하는 parthenos와 ‘열매’를 뜻하는 karpos에서 유래했다. 말 그대로 ‘처녀가 맺은 과일(Virgin fruit)’인 셈이다. 물론, 이것을 ‘탄생(Virgin birth)’이라 부를 수는 없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명을 품지 않은 열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0 무화과 과수원의 생태계
우리가 먹는 생무화과 중 다수의 품종이 앞서 말한 단위결과성으로 무화과좀벌의 도움 없이 길러진다. 하지만 야생이 아닌 과수원 중에도 여전히 이 8천만 년 된 생태계의 룰을 따르는 곳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화과 중에서도 스미르나(Smyrna) 계열의 품종들이다. 이들에게서는 단위결과성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무화과좀벌의 수분 없이는 열매를 맺어내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생명력 넘치는 과수원을 지키는 ‘농부의 역할’이다.
포도재배학을 공부해본 내게, 두 과수원 농부의 삶은 너무도 아름답고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포도 농부의 삶은 적극적인 개입과 교정의 연속이다. 포도나무는 자칫하면 열매보다 잎과 가지를 키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한다. 그래서 농부는 쉼 없이 가지를 치고(pruning), 트렐리스(trellis)를 따라 가지의 방향을 유인하며, 캐노피(canopy)를 정리한다. 나무를 끊임없이 자르고 훈련시켜, 자신이 원하는 퀄리티의 농축된 열매를 향해 생장 자체를 적극적으로 다듬어가는 돌봄의 방식이다.
그런데 무화과 과수원의 농부는 조금 다르게 일한다. 성목이 된 무화과는 포도처럼 농축된 열매를 위해 강한 가지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고 수분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무화과나무는 제 생의 리듬을 따라 스스로 가지를 뻗고 열매를 키워 달게 익혀낸다. 가지치기 역시 주로 수형을 다듬고 바람길을 열어주는 정도다. 독특한 것은 수분 방식이다.
사과나 아몬드 같은 과수원이라면, 개화기에 양봉업자의 벌통을 빌려오거나 수분수를 곁에 심는다. 하지만 무화과 농부가 과수원에 가져오는 것은 벌통이 아니다. 무화과좀벌이 태어나고 자라는 둥근 방, 즉 숫무화과(Caprifig) 열매 자체를 따다가 적절한 시기에 과수원에 걸어둔다. 말하자면 꽃가루를 나를 일꾼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화과와 무화과좀벌의 생애 주기가 완벽하게 얽혀 있는 작은 생태계 하나를 떼어다 가까이 옮겨놓는 셈이다. 그러면 숫무화과 안에서 태어나 자란 무화과좀벌이 꽃가루를 잔뜩 묻힌 채 밖으로 나와, 근처의 암무화과를 찾아 수분시킨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수분된 꽃을 열매로 키워낸다.
요컨대 무화과 농부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숫무화과를 적절한 자리에 가져다 놓아, 수천만년 전부터 이어져 온 두 생명체의 관계가 다시 스스로 작동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연결되고 나면, 하나의 생명이 움직일 때 다른 생명이 움직이고, 그 서로의 움직임이 다시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농부가 하는 일은 그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생명들을 연결해 주고 그들 고유의 질서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것이 무화과 과수원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태계다.
물론 이렇게 자라난 무화과 안에는 때로 자신의 짧은 생을 마친 무화과좀벌이 남아 있기도 한다. 무화과 안에는 피신(ficin)이라는 단백질 분해효소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좀벌이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는 꽤 많은 벌레를 먹고 산다는 걸….
여러분, 알고 있나.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무화과의 세계에는 이 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꽃과 열매와 씨앗, 그 모두를 품은 두꺼운 껍질, 그리고 그 안에서 생애를 마친 작은 생명체의 흔적까지 한 몸 안에 품은 채 익어가는 것.
요컨대 무화과는 무화과좀벌까지 품어낸 하나의 완결된 세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