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그 이유도 곧 이야기하겠지만), 아직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사석에서 와인 잔을 부딪칠 때면 꼭 듣게 되는 단골 멘트가 있다.

“와인 전문가신데, 생각보다 술을 정말 못하시네요?”

그럴 때면 나는 대개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평소대로 딱 한두 잔만 마시고 멈춘다.

그렇다. 와인 한두 잔. 

사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할 말은 산더미처럼 많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구구절절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매번 꾹 눌러 삼킨다. 그러니 실상 내가 와인을 마음 편히,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은 아주 가깝고 친밀한 오랜 사람들과 함께할 때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오랫동안 나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았던, 작고 은밀한 비밀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비밀을 여러분께 한번 털어놓으려 한다.

생각해 보면 와인은 늘 나를 어떤 ‘경계선’ 위에 세워두었던 것 같다. A라는 세계에서는 ‘와인 전문가’라는 정체성 때문에 한 발짝 물러나 조심하게 되고, B라는 세계에서는 내 타이틀에 대한 약간의 이상화와 높은 기대감, 그리고 그와는 조금 다른 나의 가치관과 와인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완전히 섞여들기가 어렵다. 그런가 하면 C라는 세계에서는 ‘와인 전문가’라는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거나 화려해서, 그 밖의 나의 다양한 면들이 조금 가려져 보이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다소 물음표로 다가왔는데, 요즘은 어느 세계의 누가 어떻게 생각해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꽤 나쁘지 않은 측면도 있다. 누가 와인 너머의 나까지 자연스럽게 궁금해하는지가 더 잘 드러나기도 하고,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본 경험과 생각을 통해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와인이란 존재가 상대에 대한 가늠을 나 대신 해주는 모양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 역시 조금은 더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또한 거기에 갇히지 않고, 나의 진심과 내가 가진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다. 어떤 방향, 어떤 방식으로든 어째서인지 와인의 존재가 나보다 커 보이는 모양이구나. 내 삶에 꽤나 재미있는 농담이다,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도 오늘은 실은 지금껏 그 어떤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굳이 설명하지 않고, 각자 마음대로 생각하게 두었던 이야기를 스스로 해보려 한다. 아마 친밀한 사람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은 알고 있었을 이야기였겠지만.

아무튼, 우선 와인, 내지는 술이 주는 ‘쾌락’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첫 번째 층위는 ‘취함에서 오는 쾌락’이다. 말 그대로 취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음주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이나 긴장을 잠시라도 지워버리고 싶을 때 찾는 쾌락에 가깝다. 이 경우에는 무엇을 얼마나 마시는가보다 결국 ‘취한다’는 감각 자체가 중요하다. 물론 가끔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지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취하는 감각 자체를 반복적으로 목적으로 삼는 일에는 분명 경계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이 도피가 되고, 다시 의존으로 넘어가는 선이 생각보다 쉽게 흐릿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층위는 ‘감각에서 오는 쾌락’이다. 이른바 ‘미식’의 영역이다. 미각이 섬세하게 발달해 있거나, 식도락의 연장선에서 술을 즐기는 애주가, 와인 애호가들이 대개 여기에 해당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듯 맛있고 좋은 와인을 찾아다니고, 혀끝에 닿는 맛과 향의 다채로움을 느끼는 쾌락이다. 어떤 면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향유라고도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층위의 분들 가운데 의외로 술을 꽤 잘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감각의 쾌락을 오래도록 즐기려면 너무 빨리 취해버려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취하지 않은 채로, 최대한 오래, 많이, 다양하게 맛보아야 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취하지 않고 오래 마셔야 하는 것’에 가깝다.

세 번째 층위는 ‘감각과 지적 욕구가 결합한 쾌락’이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훨씬 고상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번째 층위에서 차근차근 레벨 업을 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상위 단계 같은 것도 아니다. 셋은 애초에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가깝다. 누군가에게는 세 가지 쾌락이 모두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중 하나만 유독 강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셋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겠지만, 나처럼 각각을 꽤나 분리된 쾌락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십여 년을 와인을 업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위아래가 아니라 나란히 놓인 세계들이다.

이 층위는 솔직히 말하자면 일종의 지독한 ‘자기만족’에 가깝다. 그리고 나를 와인의 세계로 그토록 깊숙이 끌어당긴 쾌락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꽤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 층위에 서식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너드(Nerd, 덕후)’라고 보면 틀림없다. 겉으로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너디(Nerdy)한 구석을 하나씩 품고 사는 존재들이다. 늘 사람을 직접 대해야 하는 소믈리에 계열의 분들은 세련된 매너와 서비스 뒤에 이 본성을 제법 능숙하게 숨기는 편이다. 반면 철저히 아카데믹하고, 어찌 보면 ‘너드 양산’에 특화된 WSET 커리큘럼을 깊이 공부한 이들은 조금 다르다. 강의를 하거나, 나처럼 책을 쓰고 평론을 하는 쪽에 이르면 그 너디함이 도무지 숨겨지지 않을 때가 많다. (물론, 나는 예외적으로 아주 완벽하게 잘 숨기고 살아가는 편이라 굳게 믿고 있지만 말이다.) 재밌는 건, 전 세계 어디서든 나와 같은 WSET 디플로마를 만나보면 어째 이 성향만큼은 인종과 성별을 불문하는 만국 공통의 진리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좁고 유별난 세계 안에도 드물게 ‘나 같은 희귀종’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십여 년을 파고들어 디플로마까지 따놓고서, 정작 주량은 기껏해야 와인 몇 잔이 전부인 사람.

흔히 와인이라고 하면 예술적인 영감과 함께 느긋하게 음미하는 우아한 풍경을 떠올린다. 물론 그런 아름다운 지점이 있고, 나 역시 그런 예술성과 우아함을 사랑한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도 결국 와인을 그렇게 예술적이고 감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로운 해석에도 그것을 단단히 떠받치는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속했던 WSET 디플로마의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훈련’에 가까웠다. 내 몸과 감각을 하나의 정밀한 악기라고 치고, 끊임없이 음을 맞춰가는 과정이랄까.

와인을 한 모금 머금는 짧은 찰나에, A4 용지 한 장을 빼곡히 채울 만큼 맛과 향의 요소들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기술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감각의 증거들을 하나씩 긁어모아 포도의 품종과 산지, 재배법과 양조법, 심지어 그해의 날씨까지 역추적하며 논리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 극도로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그 감각을 머릿속에 축적해 둔 방대한 지식망과 실시간으로 매칭해야 하니, 꽤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실제로 한 와인에 집중해 맛과 향을 포착하고 글을 완성하는 데 주어지는 시간은 불과 몇 분 남짓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미각과 후각을 평소에 단단히 조율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거기에 더해, 정말이지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전 세계의 지리와 기후, 토양학, 포도재배학과 양조학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몸에는 감각의 영점을 맞춰 아예 본능처럼 체화해두고, 머리에는 방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축적해두었다가 와인 한 모금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미친 듯이 스파크를 튀기며 서로를 연결한다. 추론하고, 의심하고, 다시 검증한다. 그러다 확신이 들면 머뭇거리지 않고 답을 적어 내려간다. 나의 경우,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사이클처럼 리듬감 있게 돌아가도록 훈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니까 이 층위에서 와인을 ‘잘 마신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다. 많이 마시는 능력이 아니라, 한 모금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정확히 감지하고 읽어낼 수 있느냐에 가까우니까.

이런 테이스팅을 한 번에 수십 종씩, 몇 시간을 연달아 해야 하니, 어디 주량이 중요하겠는가? 오히려 이 세 번째 층위의 쾌락을 온전히 지키려면 ‘취하는 것’ 자체가 엄격히 금지된다. 조금이라도 취기가 돌기 시작하면 기껏 섬세하게 조율해 둔 감각의 기준점이 제멋대로 틀어지고, 머릿속에 쌓아둔 지식과 감각을 연결해 추론하는 능력과 집중력마저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와 스핏툰(Spittoon, 와인을 뱉어내는 통)은 사실상 영혼의 단짝, 한 몸이나 다름없다. 언제나 나의 ‘애완 스핏툰’을 품고 다니며 한 모금 머금고는 즉각 뱉어내야만 한다. 

이 층위의 쾌락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절제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중요한 테이스팅을 앞두었을 땐, 맵고 짠 음식이나 진한 커피, 향수는 고사하고 향이 강한 치약이나 바디용품, 심지어 세탁용품처럼 미각과 후각을 흐트러뜨릴 만한 자극들을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멀리한다. 감기에 걸리거나 비염이라도 생기거나, 입 안에 뭐라도 나면 큰일이다.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도 후각과 미각이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와인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와인의 다채로운 맛과 향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감각하고 더없이 사랑하지만, 마셔야 할 때와 마시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 와인이 입맛에 맞지 않을 땐 전혀 괜찮은데, 정말 맛있고 아름다운 와인을 한두 모금에 멈춰야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기도 하다.

결국 이 층위의 일이란 끊임없는 훈련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 훈련은 결코 혼자 할 수 없다. 좋은 선배와 동료들을 만나야 그 긴 훈련을 함께 이어갈 수 있다. 도움과 격려, 조언을 주는 선배가 필요하고, 동료들과도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의 감각을 점검하고 조율하며, 함께 완주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북돋는다. 무엇보다 ‘내 감각만이 옳다’고 믿는 것이 이 세계에서는 가장 위험하다. 실제 테이스팅에서는 결국 내가 책임지고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그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연습은 끊임없는 조율과 토론의 연속이다. 어째서 그렇게 느꼈는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서로 묻고 이야기하며 감각의 기준점을 맞춰간다. 그렇다고 타인의 감각을 맹신해서도 안 된다.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고, 경험이 적은 사람의 판단에도 충분한 논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감각과 판단을 주고받으며, 필요하다면 자신의 기준점을 다시 조율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훈련이다.

그러니 이 층위에서 ‘취한다’는 건 그리 환영받을 일이 못 된다. 나는 조금 더 그 취기에 예민해 조심할 뿐이다. 이 층위에서 만난 친구와 동료들만이 나의 그 유별난 스핏툰 사랑을 끄덕이며 이해해 주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다. 물론 그들도 가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긴 한다.

하지만 사석에서 이 복잡한 사연을 어떻게 구구절절 늘어놓겠는가. 그러니 나는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이 은밀한 비밀을 다시 덮어둔다. 이 모든 사정은, 실은 나의 타이틀과 전문성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이미지와 달리 조금도 세련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이렇게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다 보니 내가 이런 류의 훈련 과정을 꽤나 좋아해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삶에 마치 ‘모국어(Mother tongue)’처럼 주어진 것은 아무래도 언어와 사고의 세계인 것 같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로 써내고, 편집하는 일련의 사이클. 이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의 습관처럼 체화된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내 일의 가장 핵심적인 뼈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몸과 감각을 조율하고 훈련하는 영역 또한 내 삶의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이야기한 와인처럼 말이다. 텍스트로 얻은 지식을 체화시키고, 그것을 감각과 연결하고, 몸을 훈련해 다시 밖으로 끄집어내는 방식. 생각해 보면 이 메커니즘은 내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 시작은 고등학교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도합 7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다. 입시 준비를 하던 고3을 제외하면 1, 2학년 때는 내가 프랑스어과가 아니라 연극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습실과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대학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 연극과가 없었음에도 주변에서 “넌 그냥 연극과 같아”라고 할 정도로 공연장과 신방과 건물에 살다시피 했다.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온 선후배 대부분이 극회 출신인 것도 그래서다. 돌이켜보면 적지 않은 선후배들이 이후 영화와 공연계에 남았으니, 꽤나 진지하게 연극을 하던 집단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돌이켜보니 바로 그 감각이었다.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 몸을 훈련하는 일. 나는 다른 무엇보다 그 과정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라는 꽤 이른 시기부터 그런 훈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 신체와 호흡, 발성과 발음을 훈련하고, 대본의 텍스트와 캐릭터를 분석하고, 배우와 연출, 음향과 무대, 조명과 의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대본과 장면을 두고 끊임없이 토론하며 서로의 해석을 주고받고, 무대 위에서 함께 동선과 합을 맞추고, 내 움직임을 조율해가는 일. 그러고는 다시 혼자 남아 연습을 반복하던 시간들. 공연을 준비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체력을 키우고, 컨디션을 살피고 조절하던 시간들.

다루는 영역만 달랐을 뿐, 결국 텍스트로 이해한 것을 몸과 감각으로 옮겨 체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선배와 동료들과 대화하고 훈련하며 끊임없이 다듬어가는, 꽤나 비슷한 메커니즘이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전공이었던 프랑스어보다도, 경영학보다도 연극이 내게는 훨씬 익숙한 삶의 도구였다.

말하자면 나는 이런 일련의 세계를 통틀어 ‘포도의 세계’라 부르기로 했다.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내가 최근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나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 몸으로 해보는 것 사이에는 놀랄 만큼 큰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이 실제 세계에 맞닿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굳이 말하자면, 몸과 감각의 세계를 조금 더 신뢰한다.

실은 이러한 영역에서 배운 것들이 내게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굉장히 유용하다고 느낀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글 역시 몸과 감각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몸과 감각의 세계란 끊임없이 실제와 부딪히고, 수정하고, 다시 시도해보는 일의 연속이다. 말하자면 몸의 노동에 가깝다.

요컨대, 실제 포도의 세계에도 그런 면이 있다. 본래 포도나무란 덩굴식물이다. 생각보다 굉장히 연약하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제멋대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존재다. 그렇게 자연 상태 그대로 자라도록 방치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농축되고 균형 잡힌 좋은 포도를 얻기 어렵다.

그 뻗어나가는 덩굴을 오래 살피고, 방향을 잡아주고, 끊임없이 돌보는 존재가 바로 농부다. 포도나무 한 그루가 좋은 열매를 맺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 매년 반복되는 가지치기, 가지가 자라날 방향과 형태를 잡아주는 트렐리스, 하루가 다르게 돋아나는 잎과 새순을 살피고 정돈하는 캐노피 관리. 잘라내야 할 때도 있고, 묶어주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저 기다리며 지켜보아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절이 돌아오면 포도나무는 다시 자라고, 농부는 다시 살피고 다듬는다. 그렇게 해마다 같은 훈련을 반복하며 나무는 조금씩 제 몸을 만들어간다.

포도란 결국, 야생에서 햇빛을 듬뿍 받으며 마냥 행복하고 자유롭게 자란다고 해서 저절로 우리가 원하는 열매를 맺는 식물은 아니다. 자라는 동안 끊임없이 제 몸을 조율하고 다듬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엄격함만큼이나 많은 보호와 보살핌이 따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 훈련과 돌봄을 거친 포도나무에서 비로소 농축되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품은 과실이 태어난다. 말하자면 특상품 포도.

반복하고, 조율하고, 때로는 잘리고, 기대고, 돌봄을 받으며. 제 수형을 만들고, 단단해진 트렁크에 지나온 훈련을 새겨가는 존재. 그렇게 자신이 품은 가능성을 가장 농축된 형태로 빚어내는 존재.

그렇게 포도는 제멋대로 뻗어나가던 덩굴에서, 비로소 한 그루의 나무 같은 ‘몸’을 만들어간다.

이처럼 내게 ‘포도의 세계’는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내 몸에 잘 맞는 자연스러운 세계다. 새로운 ‘무화과의 세계’ 앞에서, 어쩌면 나는 한 번쯤 내가 지나온 세계를 돌아보고 그 기준점을 찾아봐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지점에서, 내가 오래 살아온 ‘포도의 세계’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꽤나 오래 들여다보며 글을 써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떤 폐기나 전향이라기보다, 통합과 확장의 방향에 가깝게 느껴진다. 요컨대 이 두 세계는 꽤나 좋은 단짝처럼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삶의 ‘몸’을 만들어가며 오래도록 훈련해온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의외로 대단한 능숙함이나 세련됨이라기보다 단단함과 유연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단단해진 세계는 무엇인가를 부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힘이 있고,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기꺼이 듣고 품어줄 안정감과 넉넉함이 있다. 그래서 더 밖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고 연결될 수도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내 창고 속 옛것과 새것 어느 것도 버리지 않은 채, 이 자리 있어볼 생각이다.

새로운 ‘무화과의 세계’가 불쑥 나타나버린 지금은 더욱더.

Monica Seokin Lee 이석인

Writer · Wine Expert · Dubai

『포도에서 와인으로』, 『포도빛 바람이 불어오는 곳, 부르고뉴』를 썼다. WSET Diploma를 취득했다. 서울과 싱가포르, 홍콩을 거쳐 두바이에 살며, 책과 와인, 예술과 도시를 읽고 그 사이에서 발견한 것들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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